익산 왕궁리유적
위치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666
사진.자료출처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 왕궁리성지라 불리우는, 왕궁리유적 * 1998년 9월 17일 사적 제408호로 지정된 유적으로 면적은 21만 6,862㎡에 이른다. ‘왕궁리성지’라고도 부르며 마한·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발굴조사한 결과, 이 유적은 적어도 세 시기(백제 후기∼통일신라 후기)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석탑 동쪽으로 30m 지점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기와 가마 2기를 발견했다. 특히, 탑을 에워싼 주변의 구릉지를 중심으..

* 왕궁리성지라 불리우는, 왕궁리유적 *

1998년 9월 17일 사적 제408호로 지정된 유적으로 면적은 21만 6,862㎡에 이른다. ‘왕궁리성지’라고도 부르며 마한·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발굴조사한 결과, 이 유적은 적어도 세 시기(백제 후기∼통일신라 후기)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석탑 동쪽으로 30m 지점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기와 가마 2기를 발견했다. 특히, 탑을 에워싼 주변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평지성으로 생각되는 성곽 유물을 찾았다.

성곽의 모습은 현재 발굴을 통해 점점 드러나고 있다. 또한 성곽 안팎으로 폭이 약 1m 정도로 평평한 돌을 깔아 만든 시설이 발견되어 성곽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지역 안에 있는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과 절터의 배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유물, 바깥쪽을 둘러싸고 있는 직사각형의 성이 발견되어, 백제 후기의 익산 천도설이나 별도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 왕궁리유적, 백제사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 *

왕궁리유적은 인접한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와 함께 최대 규모의 백제 유적으로 꼽힌다. 크기를 떠나 왕궁리유적이 관심을 받는 이유는 왕궁리유적터가 백제의 왕도였다는 왕도설과 백제 후기 익산 천도설 등의 역사적 가설에 뒷받침이 되는 유적이기 때문이다.

익산이 백제의 왕도였다는 학설은 <신증동국여지승람>, < 대동지지>, <익산읍지> 등의 문헌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이곳이 '옛날 궁궐터’ '무왕이 별도(別都)를 세운 곳', '마한의 궁성터'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료와 왕궁리유적의 발굴로 익산 왕도설이 힘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익산이 백제의 왕도였다는 왕도설 등은 아직까지 백제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왕궁리유적전시관]
왕궁리유적전시관은 왕궁리5층석탑이 위치한 왕궁리유적 남측에 건립되어 2008년 개관한 전시관으로 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내용을 소개하고 출토유물을 전시하여 문화교육장으로 활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왕궁리유적은 1989년부터 20년 동안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에 왕궁으로 건립되어 경영되다 후대에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시관에서는 왕궁리유적의 발굴조사 내용을 영상으로 제작하고 중요 출토유물을 전시하여 왕궁리유적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고 백제기와를 관람객이 직접 만져보면서 기와 제작과정을 살펴볼 수 있으며, 목판찍기 체험도 준비되어 있다.
백제 왕궁터는 우리나라 고대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함께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하던 정전건물지를 비롯한 14개의 백제 건물지와 백제 최고의 정원유적, 금, 유리, 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지, 우리나라 최고의 위생시설인 대형화장실 유적 등이 조사되어 왕궁의 축조 과정과 왕궁에서의 생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유물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중 300여 점을 선정·전시하였는데, 왕궁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금제품, 유리제품, 수부(首府)명 인장와, 전달린토기 등과 함께 연화문 수막새, 각종 인장와와 토기류, 금과 유리제품을 생산하던 도가니 등이 전시되어 있다.
* 개관일 : 2008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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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5층석탑
위치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80-1 (왕궁면)
사진.자료출처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 고려 전기의 석탑, 왕궁리 5층석탑(국보289호) * 1997년 1월 1일 국보 제289호로 지정된 석탑이다. 마한시대 도읍지로 알려진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석탑이다. 1기단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수리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1965년 해체·수리하면서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고려시대 유물은 국보 제289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

* 고려 전기의 석탑, 왕궁리 5층석탑(국보289호) *

1997년 1월 1일 국보 제289호로 지정된 석탑이다. 마한시대 도읍지로 알려진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석탑이다. 1기단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수리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1965년 해체·수리하면서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고려시대 유물은 국보 제289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석탑의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탑주변에서 "왕궁사" "대관" 등의 명문기와가 수습되어 궁성과 관련된 사찰이 건립되는 과정에서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또, 탑 해체 복원시 제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부에서 금제 금판경과 사리함, 청동불상 등이 수습되어 국보 제 123호로 지정되었는데, 이들 유물이 "관세음 음험기"에 나오는 제석사지 칠층목탑 내의 유물과 같은 종류이어서 제석사지 목탑과 관련되어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특징으로는 백제 석탑양식을 충실히 따른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의 석탑이며, 석탑 하부에서 백제시대 판축이 확인되어 백제 시대 목탑 또는 건물지가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

* 왕궁리 5층석탑의 구조 *

높이 8.5m이다. 기단부에 탱주(撑柱)가 2개 있는 사각형 석탑이며 옥신(屋身)과 옥개석은 모두 여러 개의 석재(石材)로 구성되었다. 옥신부는 4우주(四隅柱)와 탱주가 각출된 중간석 등 모두 8개로 되었고, 2층은 4면 1석으로 4개, 3층 이상은 2개의 석재로 조립하였다. 옥개석은 넓은 편이며 개석과 받침이 각각 다른 돌이고 받침은 3단씩이다. 개석은 1층부터 3층까지 8석, 4층과 5층은 4석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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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위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
사진.자료출처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 백제 최대 가람, 미륵사지 *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 된 마동 즉, 무왕(백제 30대왕 600-641)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 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삼존을 위하여 전(금당), 탑, 낭무(화랑)을 세웠다고 한다. 이와 달리 미륵사의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 백제 최대 가람, 미륵사지 *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 된 마동 즉, 무왕(백제 30대왕 600-641)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 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삼존을 위하여 전(금당), 탑, 낭무(화랑)을 세웠다고 한다. 이와 달리 미륵사의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해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추측이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만 아니라,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었을 것이다. 미륵사가 백제불교에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었음은 분명하며, 신라최대의 가람인 황룡사가 화엄사상의 구심점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황룡사가 1탑 3금당식인 것과 달리 미륵사는 3탑 3금당식 가람배치이다. 황룡사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화엄사상, 미륵사는 미륵사상을 가람에 구현하고 있다. 미륵사는 일반평민 대중까지 용화세상으로 인도하겠다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 미륵사지의 또다른 유물, 미륵사지 석탑과 당간지주 *
미륵사지에는 두 가지의 유물이 있어 볼거리를 더한다. 그 하나는 미륵사지 석탑이고, 다른 하나는 미륵사지 당간지주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 11호로 현재 높이 14.24m이고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석탑이다. 석탑은 거의 전면이 붕괴되어 동북면 한귀퉁이의 6층까지만 남아있으나 본래는 9층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1974~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에 의하여 동쪽탑은 목탑이 아니라 석탑임이 밝혀져 이른바 동서 쌍탑의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동탑은 그 뒤 발굴조사에 의해서 9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9층(높이 27.67m)으로 복원되었다. 이 석탑을 우리나라 최고의 석탑으로 보고 있는 이유는 이 탑의 양식이 그 이전에 성행하였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써 충실하게 재현하였기 때문이다.
당간지주란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운 기둥, 즉 지주를 말한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보물 제 236호로, 높이 395cm이며 통일신라시대 중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 남쪽에 2개의 지주가 동서로 약 90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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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보석박물관
위치 전북 익산시 왕궁면 호반호 8
사진.자료출처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예로부터 익산은 보석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러한 익산의 지역적 특색을 살려 설립된 것이 바로 보석박물관이다. 익산 보석박물관은 백제 문화유적과 보석의 아름다움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141,990㎡ 규모의 왕궁보석 테마관광지내에 건립되었으며, 진귀한 보석 원석 등을 11만여 점 이상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 수준의 박물관이다. 또한, 지질시대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화석전시관에는 시대별 각종화석과 익룡, 수장룡, 실물크기의 골격공룡 등을 전시하여 청소년들에게 상상의 세계를 펼칠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보..

예로부터 익산은 보석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러한 익산의 지역적 특색을 살려 설립된 것이 바로 보석박물관이다. 익산 보석박물관은 백제 문화유적과 보석의 아름다움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141,990㎡ 규모의 왕궁보석 테마관광지내에 건립되었으며, 진귀한 보석 원석 등을 11만여 점 이상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 수준의 박물관이다.
또한, 지질시대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화석전시관에는 시대별 각종화석과 익룡, 수장룡, 실물크기의 골격공룡 등을 전시하여 청소년들에게 상상의 세계를 펼칠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보석박물관은 보석박물관과 화석전시관, 체험관 등으로 구성되며 해당 구역의 구성은 각각 보석박물관 6,214㎡ (지하1층, 지상2층),  화석전시관 932㎡ (지하1층, 지상2층), 체험관 574㎡ (지하1층, 지상2층) 으로 이루어져 있다.

* 보석박물관의 체험 프로그램 *
보석박물관에서는 주말에 방문하는 관람객에게 귀금속 보석에 관련된 체험학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운영기간은 동절기를 제외한 3월부터 11월까지이며, 익산보석박물관 2층 아트갤러리에서 진행된다.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칠보공예기법을 응용한 은 액세서리 장신구 만들기인 칠보공예와 보석물리기(핸드폰줄,목걸이), 은반지 등을 만들 수 있는 나만의 보석 만들기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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