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첨성대
종목 국보 제31호
시대 신라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높이 9.17m의 원통형 모양을 하고 있는 천문관측대로 불리고 있다. 첨성대에 관한 주장은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 오늘날 기상청과 같이 천문을 관측하던 관청 내부의 상징물 등 이견이 분분하나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던 천문대라는 주장이 가장 많다.1) 첨성대는 왜 만들었나? - 신라사람들의 생계수단은 대부분이 농사이다. 따라서 천문을 관측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아주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며 왕은 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높이 9.17m의 원통형 모양을 하고 있는 천문관측대로 불리고 있다. 첨성대에 관한 주장은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 오늘날 기상청과 같이 천문을 관측하던 관청 내부의 상징물 등 이견이 분분하나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던 천문대라는 주장이 가장 많다.

1) 첨성대는 왜 만들었나? - 신라사람들의 생계수단은 대부분이 농사이다. 따라서 천문을 관측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아주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며 왕은 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여자로서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던 선덕여왕에게는 왕권강화가 절실했으며 백성들을 위함과 부합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를 만든 정확한 년도 등 기록은 없으나 선덕여왕 재위 동안 만들었다는 삼국유사 기록과 선덕여왕 재위이후 천문관측 기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 선덕여왕때 만들어진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진 첨성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신라인의 우주관을 담고 있다.

2) 천문대는 산에 있어야 하는데... -  현재 천문대는 높은 산의 정상에 위치해 있다. 이는 대기오염으로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고 도시의 밝은 불빛들이 별을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시대 밤하늘엔 공기의 오염도 밝은 불빛도 없었으니 평지라도 별을 관측하는데 불편한 것이 없었다. 또한 관측 결과를 임금에게 보고하고 임금은 이를 백성들에게 알려 농사에 도움을 주고자 했기에 산에 위치해 있으면 보고 시간도 늘어나고 그만큼 정보 전달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임금이 사는 궁궐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3) 첨성대는 어떻게 구성됐나? - 첨성대는 기단부, 원주부, 정자부 이렇게 3부분으로 구성이 돼 있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신라시대 우주관인‘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석굴암 건축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첨성대도 기단부는 네모로 원주부는 둥글게 만들어 천원지방 사상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4) 어떻게 별을 관측하나? - 지상에서 남쪽 창으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 12단까지 돌과 자갈로 채워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안에서 19, 20단에 걸쳐진 정자석(井字石)에 다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25, 26단의 정자석까지 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 27단에 반원 모양의 널다란 돌이 놓여있고 그 위에 앉아 별을 관측했다.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구실을 하였던 기구인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별을 관측해 24절기를 측정하였으며 별을 관측하던 기구를‘망통’이라 하며 관측하는 사람을‘일관’이라 불렀다.

5) 첨성대가 의미하는 것 - 첨성대는 선덕여왕 재위시설 만들어져 1300여년간 신라의 하늘을 바쳐왔는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으며 처음 만들 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천문대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 둥근 원통형의 원주부는 모두 27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출입구로 알려진 남쪽창이 중앙 3단에 걸쳐 있으며 나머지 24단이 1년의 24절기를, 아래 위 12단이 1년 12달을, 세는 사람에 따라 돌의 개수가 362개 음력의 날수와 일치하는 등 천문관측과 관련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정자부의 각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 네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며 남쪽 창은 임금이 살던 월성 쪽이다.

5) 1300여년간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 경주는 지진대가 지나는 불안정한 지형으로 예로부터 지진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많다. 그 중 한 기록은 지진으로 인해 2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기록이 전해질만큼 큰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데 첨성대는 어떻게 그 지진을 견딜 수 있었나? 한마디로 잘 만들었기 때문이다. 첨성대 아래로 1.5m 정도 땅을 잘 다진 후 2단의 기단을 설치하고 돌들을 원통형으로 쌓았는데 이 돌을 쌓을 때 직각으로 쌓지 않고 안쪽으로 기울게 들여쌓기를 한 후 안을 채워 무너질 수 없는 구조로 만들었다. 그리고 19, 20단과 25, 26단에 정자석을 질러 돌들을 붙잡는 역할을 해 돌을 붙이는 접착제나 이음쇠가 없이도 강한 지진에 잘 견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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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석빙고)
종목 보물 제66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월성의 허물어진 성벽사이로 난 길을 지나 언덕 위 서쪽으로 100m 쯤 걸으면 둔덕 위에 돌로써 만든 자그마한 우진각 지붕을 얹은 환기통 3개가 보이는 곳이 조선시대에 만든 석빙고다. 동쪽은 돌과 흙담으로 가려져 있고 서쪽과 남쪽 앞은 트이어 있다.몇 년 전까지는 남쪽으로도 담이 둘러 있었다. 사람 키 정도인 1.75m 높이에 2m 너비로 된 입구에서 두 계단 내려서면, 조금 좁고 낮은 입구가 또 있어, 지금은 쇠막대기로 문을 만들어 놓았다. 그 속은 낮게 돼 있고 돌계단으로 내려간다. 문 가까이에서 한참을 들여다봐야 내부가 보..

월성의 허물어진 성벽사이로 난 길을 지나 언덕 위 서쪽으로 100m 쯤 걸으면 둔덕 위에 돌로써 만든 자그마한 우진각 지붕을 얹은 환기통 3개가 보이는 곳이 조선시대에 만든 석빙고다. 동쪽은 돌과 흙담으로 가려져 있고 서쪽과 남쪽 앞은 트이어 있다.

몇 년 전까지는 남쪽으로도 담이 둘러 있었다. 사람 키 정도인 1.75m 높이에 2m 너비로 된 입구에서 두 계단 내려서면, 조금 좁고 낮은 입구가 또 있어, 지금은 쇠막대기로 문을 만들어 놓았다. 그 속은 낮게 돼 있고 돌계단으로 내려간다. 문 가까이에서 한참을 들여다봐야 내부가 보이는데, 1,000여 개의 돌로 너비 5.76m, 높이 5.45m, 길이 12m 되게, 바닥은 흙이고, 그 위는 돌을 쌓아 천정을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朗), 즉 5개의 아치형으로 짜 만들었다. 출입구 앞 머릿돌에 음각으로, 석빙고(石氷庫)라고 씌어있다.

석빙고는 신라시대 만든 냉장고인데 임금이 여름에 시원한 음식을 먹으려고 얼음을 넣어 뒀던 얼음 창고다. 『삼국사기』에 보면, 지증왕이 505년 '겨울에 얼음을 저장해 두었다가 여름에 쓰라.'고 명령하였다 했고, 여기는 신라 궁궐터니까 이 석빙고는 신라시대 것이리라, 대부분 이렇게 알고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신라 22대 지증왕 때, 얼음 저장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그 저장소는 알 길이 없고, 월성에 있는 이 석빙고는 조선시대 영조 때, 처음 만들었다가 3년만에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는 말이 맞다.

조선시대에 왜 고을마다 얼음을 저장했는가 하면, 한마디로 약재(藥材)로 쓰기 위한 것이다. 즉 여름철에 열병이 돌아 몸이 불덩이 같이 열이 날 때, 그 열을 식히기 위한 얼음찜질용이다.

또 한가지 용도는 여름에 사람이 죽었을 때, 시체의 부패를 최소화하는 물품으로 얼음을 썼다. 집안 지체의 높낮이에 따라 계급의 고하에 따라 분배량이 달랐다고 한다. 그러니 오늘날 집집마다 있는 냉장고와 같이 음식을 저장하고 차게 하는 용도로서의 생활용품이 아니었다는 거다.

한 겨울에 얼음이 가장 두껍게 얼었을 때, 일정한 두께 이상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저장했다. 석빙고 바닥에 짚을 깔고 얼음을 한벌 놓고 사이사이에 짚과 등겨를 덮고, 다시 얼음을 재는 것을 반복했다. 조금씩 녹은 물은 빨리 빠져나가도록 뒤쪽으로 가면서 바닥이 낮게 돼 있고 맨 끝에는 물 빠지는 배수구를 만들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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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
종목 사적 제18호
시대 통일신라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삼국이 원수처럼 여기며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통일전쟁이 드디어 끝이 났다.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도 힘들었지만, 당과의 전쟁은 더욱 힘든 싸움이었다. 나당 전쟁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뭉치게 하고 그 힘으로 압록강과 원산만 이북으로 당을 몰아냈다.문무왕은 통일신라를 더욱 견고히 하고자 도성(都城) 밖을 지키는 나성(羅城)  을 세우고자 했다. 이때 왕사(王師) 지의법사의 다음과 같은 간언으로 기존의 산성을 개, 증축하여 수도 방어벽을 굳건히 하는데 힘을 쏟았다. "임금님께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

삼국이 원수처럼 여기며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통일전쟁이 드디어 끝이 났다.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도 힘들었지만, 당과의 전쟁은 더욱 힘든 싸움이었다. 나당 전쟁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뭉치게 하고 그 힘으로 압록강과 원산만 이북으로 당을 몰아냈다.

문무왕은 통일신라를 더욱 견고히 하고자 도성(都城) 밖을 지키는 나성(羅城)  을 세우고자 했다. 이때 왕사(王師) 지의법사의 다음과 같은 간언으로 기존의 산성을 개, 증축하여 수도 방어벽을 굳건히 하는데 힘을 쏟았다. "임금님께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땅에 금을 그어 놓아도 도적이 넘지를 못하고, 덕이 없으면 아무리 높은 성을 쌓아도 도적이 담을 넘을 것입니다. 이제 전쟁의 위험은 없어졌으니 나성의 건축은 마땅하지 않사옵니다."

한편 백제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문화와 고구려의 강하고 기상이 넘치는 문화에 감동된 왕은 월성(현, 반월성) 동쪽에 둘레 1,200m의 연못과 '임해전(臨海殿)'외 여러 전각을 짓고, 동궁(東宮)과 연회장으로 사용하게 했다. 세 개의 섬과 동쪽, 북쪽에 12봉우리를 만들어, 바다에 신선이 사는 형상인 삼신산(三神山)과 무산12봉(巫山十二峯)을 만들었다. 직선과 곡선이 겹쳐 굽이치는 호안은 작은 섬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한 곳에 서서 못의 크기를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백제, 고구려 문화와 신라의 감각이 하나로 어우러진 통일의 연못. 그 곳에서 파낸 흙으로 산을 만들고 동물들을 풀어 키우며, 나무와 화초를 심었다. 여러 개의 돌을 모아 쌓다가 한 개의 돌을 우뚝 솟게 하며, 드문드문 배치하는 등 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이다.
 
인공 연못인 월지는 물의 정화를 위해 물이 들어가는 입수구에 2단에 걸쳐 자연 정화장치를 설치했다. 깨끗한 물을 담기 위해 못 바닥에는 바다 자갈을 경사지게 깔아 입수구와 배수구 물의 흐름을 원만하게 했다.
 

수로를 따라 들어 온 물은 두 개의 수조에 차례대로 고였다가 넘쳐흘러 넓은 웅덩이에 다시 모인다. 웅덩이에 모인 물은 좁은 물길을 따라 흘러가다 두 단의 폭포로 떨어져 바다같은 못으로 힘차게 밀고 들어간다. 폭포 바로 앞 큰 섬이 물을 두 갈래로 갈라놓는다.

좌우로 갈라진 물은 구석지고, 깊숙한 곳까지 흘러 들어가 고여 있던 물을 밀어내고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밀려난 물이렁은 수면 곳곳에  '井'자형 나무틀 안에 심어진 부평초를 흔들어 대고, 구름 걸린 전각마저 흔들고 지나간다. 자연을 축소하여 별궁 정원에 들여 왕실과 나라의 안녕를 기원하는 신선의 바다를 담고, 민족문화의 융성기를 대표하던 월지는 경순왕의 눈물을 받아내며 쇠락의 길을 걷는다.
 

삼국사기 30대 신라 문무왕 14년(647) 2월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했으나 연못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신라 41대 헌덕왕조에 '태자를 월지궁에 거처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안압지(雁鴨池)'란 이름은 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하는데, 나라가 망하고 궁이 폐허가 되고 연못에는 오로지 오리와 기러기만 유유히 노닐고 있는 것을 조선시대 선비들이 보고 '안압지(雁鴨池)'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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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계림
종목 사적 제19호
시대 신라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始林)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鷄林)이라 하였다.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始林)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鷄林)이라 하였다.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 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 이후 내물왕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김알지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은 신성스러운 곳으로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碑)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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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
종목 사적 제502호
시대 통일신라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울산으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 시내를 벗어나면 꽤 높은 산이 동편에 나타난다. 신라인들이 동악이라 부르며 신성시하던 토함산이다. 이 산에는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건립된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석굴암에서 동쪽 산비탈을 곧장 내려가면 장항리를 지나, 위대한 통일군주 문무대왕이 잠든 대왕암이 있는 동해로 이어진다. 일연 스님이 지은「삼국유사」에는 재상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만들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과연 재상의 신분으로 불국사와 석..

울산으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 시내를 벗어나면 꽤 높은 산이 동편에 나타난다. 신라인들이 동악이라 부르며 신성시하던 토함산이다. 이 산에는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건립된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

석굴암에서 동쪽 산비탈을 곧장 내려가면 장항리를 지나, 위대한 통일군주 문무대왕이 잠든 대왕암이 있는 동해로 이어진다. 일연 스님이 지은「삼국유사」에는 재상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만들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연 재상의 신분으로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큰 토목공사를 할 수 있는 재력이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경덕왕 때인 751년 공사를 시작해,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했다 한다. 총 공사기간은 24년이다.

 

부처님 나라를 만든 신라인의 자신감 - 불국사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자신감은 사람들이 사는 땅위에 부처님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로 표현된다. 신라사람들은 옛날부터 신성시 한 토함산에 부처님 나라를 만들었다. 불국사(佛國寺) 이름을 그대로 해석하면 부처님 나라가 된다.

불국사는 토함산 서쪽 경사진 곳에 축대를 쌓고 절을 세운 산지가람의 성격을 띠고 있다. 불국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천왕문을 통해 들어오면 정면에 보이는 백운교, 청운교, 자하문, 범영루, 좌경루가 있고 안쪽에는 석가탑, 다보탑, 무설전으로 구성된 대웅전영역과 이보다 조금 낮은 축대 위에 세워진 연화교, 칠보교, 안양문 등으로 구성된 극락전영역이다.

불국사를 정면에서 살펴보면 석가정토의 대웅전이 아미여래의 극락전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석가여래 상주 설법탑.
 

신라 삼층석탑의 기준 - 석가탑 (국보 21호)

석가탑(석가여래 상주 설법탑)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높이는 8.2m, 아무런 조각이 없는 2층 기단 위에 3층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양식이다. 석가탑은 통일신라 초기에 만들어진 감은사 탑과 고선사 탑이 지닌 무거운 석탑양식에서 벗어나 날씬한 비례를 적용함으로써 더욱 추상적이고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후 신라석탑의 기준이 된다. 1966년 석가탑을 해체하였을 때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왔다.

 


▲다보여래 상주 증명탑.
 

신라석공의 솜씨 자랑 - 다보탑 (국보 20호)

다보탑(다보여래 상주 증명탑)은 석가여래의 설법을 찬양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다보탑은 높이 10.4m로 석가탑 보다 조금 높다. 4개 계단이 있는 정사각형의 기단 위에 1층은 속이 보이게 네 기둥을 세웠고, 지붕은 사각으로 기와집의 처마를 달았다. 2층은 사각난간이 있고 지붕은 팔각이다.

3층은 팔각난간과 연꽃이 활짝 핀 원으로 된 지붕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도형을 통해 많은 변화를 주었다. 다보탑의 복잡하고 화려한 장식 및 독특한 구조와 표현법은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것으로 단단한 화강암을 이용해 목조건축처럼 만든 신라석공의 솜씨가 놀랍다.

대웅전영역을 하늘에서 보면 탑과 축대의 배치 또한 절묘하다. 단순 소박한 석가탑은 복잡 화려한 범영루 뒤에, 복잡 화려한 다보탑은 단순 소박한 좌경루 뒤에 두어 3차원적인 균형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지닌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범영루와 좌경루의 모습이 다르게 된다. 불국사 축대에는 건축의 기본원리인 좌우대칭의 미를 따르지 않는 독창적인 멋이 숨어 있다. 다보탑에는 돌사자가 한 마리 있는데 원래는 네 마리가 귀퉁이마다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 세 개는 사라지고 얼굴이 깨어진 한 마리만 남아 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 - 극락전 금동아미타불 (국보 27호)

연꽃다리와 일곱 보석다리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극락세계다. 이곳에는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금동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원만한 얼굴에 오른쪽 어깨는 가사를 벗었고 오른손은 가볍게 다리 위에 얹었다.

곧은 몸과 단정하고 인자한 얼굴 모습은 전체적으로 자비롭고 존엄한 느낌을 준다.
극락전 아미타불은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가장 크고 훌륭한 불상으로 비로전의 비로자나불과 백률사의 약사여래상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3대 금동불이라 불린다.


부처님의 본체 - 비로자나불 (국보 26호)

비로전은 관음전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곳에 있다. 화엄경 사상에 따르면 비로자나불은 모든 부처님의 본체로 ‘빛을 인간세계에 널리 비쳐 준다’는 뜻이다. 수인은 지권인으로 오른손은 부처의 세계를 표시하고 왼손은 중생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런 형상으로 손가락의 모습을 취하여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깊은 뜻을 나타낸다. 비로자나불의 얼굴 모습과 옷의 처리 등 세련된 수법은 지극히 아름다운 형상을 나타내어 신라인의 탁월한 솜씨를 보여 준다.
 


극락세계에 이르는 연꽃다리와 일곱 보석다리.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푸른 구름다리, 흰 구름다리.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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