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판소리 박물관
위치 전북 고창군 고창읍 동리로 100
연락처 063)560-8061
자료.사진출처 고창판소리박물관
고창판소리박물관은 판소리의 이론가이자 개작자, 후원가였던 동리 신재효 및 진채선, 김소희 등 다수의 명창을 기념하고 판소리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동리 신재효 선생의 고택 자리에 설립되었다. 고택은 현재 사랑채만 복원되어 남아 있으며 바로 옆에는 동리 국악당이 있다.판소리 박물관은 이와 같은 판소리의 유형무형의 자료를 수집.보존.조사.연구.전시.해석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 수준높은 판소리 예술의 재교육과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마침내 판소리 성지화를 꾀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

고창판소리박물관은 판소리의 이론가이자 개작자, 후원가였던 동리 신재효 및 진채선, 김소희 등 다수의 명창을 기념하고 판소리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동리 신재효 선생의 고택 자리에 설립되었다. 고택은 현재 사랑채만 복원되어 남아 있으며 바로 옆에는 동리 국악당이 있다.

판소리 박물관은 이와 같은 판소리의 유형무형의 자료를 수집.보존.조사.연구.전시.해석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 수준높은 판소리 예술의 재교육과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마침내 판소리 성지화를 꾀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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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사 대웅전
종목 보물 제290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선운사는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진흥왕이 세웠다는 설과 백제 고승 검단선사가 세웠다는 두가지 설이 전한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에는 진흥왕이 세우고 검단선사가 고쳐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선운사 대웅전은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전하며, 현재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다시 지은 것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려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앞면 5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만든 기둥위의 장식구조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

선운사는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진흥왕이 세웠다는 설과 백제 고승 검단선사가 세웠다는 두가지 설이 전한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에는 진흥왕이 세우고 검단선사가 고쳐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선운사 대웅전은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전하며, 현재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다시 지은 것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려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만든 기둥위의 장식구조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옆면에는 높은 기둥 두 개를 세워 간단히 처리하였다.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건물 뒤쪽의 처마는 간략하게 처리되어 앞뒤 처마의 모습이 다르며 벽은 나무판으로 이루어진 널빤지벽이다.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였고 단청벽화가 매우 아름답다.

조선 중기의 건축답게 섬세하고 장식적인 구성과 빗살 여닫이문이 화려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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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읍성
종목 국보 제145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옛 고창 고을의 읍성으로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대륙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단종 원년(1453)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최근 보수공사를 하여 원형에 가깝도록 복구하였다. 성 둘레는 1,684m이며, 동·서·북문과 옹성이 3개소, 장대지 6개소와 해자들로 된 전략적 요충시설이 갖춰져 있다. 성 안에는 동헌·객사를 비롯하여 22동의 ..

옛 고창 고을의 읍성으로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대륙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단종 원년(1453)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최근 보수공사를 하여 원형에 가깝도록 복구하였다. 성 둘레는 1,684m이며, 동·서·북문과 옹성이 3개소, 장대지 6개소와 해자들로 된 전략적 요충시설이 갖춰져 있다. 성 안에는 동헌·객사를 비롯하여 22동의 관아건물들로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손실되었다.

이 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주초와 문짝을 달던 홈이 파인 누문(樓門)을 가지고 있어, 평양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문,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강화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양식과 비교되어 성곽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여성들의 성벽 밟기 풍습으로 유명한데, 한 해의 재앙과 질병을 쫓고 복을 비는 의식의 하나로 좋은 민속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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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고인돌
종목 사적 제391호
시대 청동기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지석묘란 선사시대 무덤형식의 하나로 고인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창 아산면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약 1.8㎞에 이르는 야산 기슭에 440여 기의 고인돌이 무리를 지어있다.기원전 400년∼500년 무렵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집단무덤으로, 이 지역을 지배했던 족장들의 가족무덤인 듯 하다.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은 낮은 야산과 농사 짓기 좋은 이 지역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바둑판 모양의 남방식, 탁자 모양의 북방식, 천장돌만 있는 개석식 등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고인돌의 각종 형식을 갖추고 있어 고인돌의 발..

지석묘란 선사시대 무덤형식의 하나로 고인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창 아산면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약 1.8㎞에 이르는 야산 기슭에 440여 기의 고인돌이 무리를 지어있다.

기원전 400년∼500년 무렵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집단무덤으로, 이 지역을 지배했던 족장들의 가족무덤인 듯 하다.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은 낮은 야산과 농사 짓기 좋은 이 지역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둑판 모양의 남방식, 탁자 모양의 북방식, 천장돌만 있는 개석식 등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고인돌의 각종 형식을 갖추고 있어 고인돌의 발생과 성격을 아는데 매우 중요하다. 아산면 상갑리 일대 고인돌은 북방식 고인돌의 남쪽 한계선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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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고인돌박물관
위치 고창군 고창읍 고인돌공원길 74
연락처 063-560-8666
자료.사진출처 고창군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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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
종목 천연기념물 제184호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부른다.고창 삼인리의 동백나무숲은 백제 위덕왕 24년(577) 선운사가 세워진 후에 만들어 진 것으로 나무의 평균 높이는 약 6m이고, 둘레는 30㎝이다. 절 뒷쪽 비스듬한 산아래에 30m 넓이로 가느다란 띠모양을 하고 있다.고창 삼인리의 동백나무숲은 아름다운 사찰경관..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부른다.

고창 삼인리의 동백나무숲은 백제 위덕왕 24년(577) 선운사가 세워진 후에 만들어 진 것으로 나무의 평균 높이는 약 6m이고, 둘레는 30㎝이다. 절 뒷쪽 비스듬한 산아래에 30m 넓이로 가느다란 띠모양을 하고 있다.

고창 삼인리의 동백나무숲은 아름다운 사찰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사찰림으로서의 문화적 가치 및 오래된 동백나무숲으로서의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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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전봉준 생가
​ 전봉준(全琫準, 1854년 ~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은 조선의 농민 운동가이자 동학의 종교 지도자였다. ​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의 남접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 본관은 천안(天安), 초명은 명숙(明淑), 다른 이름은 영준(永準) 이며 호는 해몽(海夢)이다. ​ 별명이었던 녹두장군(綠豆將軍)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키가 작아 붙여진 별명이다 . 1890년대 초 한때 흥선대원군 문하의 식객으로 있었다. ​ 1894년 2월 15일 고부에서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1차 봉기를 주도하..

전봉준(全琫準,

1854년 ~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은 조선의

농민 운동가이자 동학의 종교 지도자였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의 남접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본관은 천안(天安),

초명은 명숙(明淑), 다른 이름은 영준(永準)

이며 호는 해몽(海夢)이다.

별명이었던

녹두장군(綠豆將軍)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키가 작아 붙여진 별명이다

.

1890년대 초

한때 흥선대원군 문하의 식객으로

있었다.

1894년 2월 15일

고부에서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1차 봉기를 주도하였으나

 조정의 회유책으로

 해산했다가, 3월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李容泰)가 동학

농민군을 도적으로 규정하여 동비(東匪)라 칭한 뒤,

동학군과 협력자를 처벌,

처형하고 관련없는 농민들까지 동비로 몰아 처단하자

다시 봉기를 일으킨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온건파 지도자들 중의 한사람이자 농민군의

북접을 지휘하였으며,

거사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하여 연결을

시도했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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