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관음포
종목 사적 제232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노량해전으로 더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선조 31년(1598)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이 도망가는 왜적들을 무찌르다 관음포 앞바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은 적의 탄환에 맞아 최후를 마쳤다. 이에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부르며, 마주보는 해안에는 이락사가 있다. 그 후 순조 32년(1832)에 왕명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단과 비, 비각을 세웠다. 1965년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인 ‘대성운..

노량해전으로 더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선조 31년(1598)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이 도망가는 왜적들을 무찌르다 관음포 앞바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은 적의 탄환에 맞아 최후를 마쳤다. 이에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부르며, 마주보는 해안에는 이락사가 있다.

그 후 순조 32년(1832)에 왕명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단과 비, 비각을 세웠다. 1965년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인 ‘대성운해(大星殞海)’와 ‘이락사’라는 액자를 경내에 걸었다.

이락사와 관음포 앞바다는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의 공로와 충의가 담긴 역사의 옛터일 뿐 아니라 전쟁극복의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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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충렬사
종목 사적 제233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남해충렬사는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노량충렬사라고도 한다. 통영의 충렬사와 함께 ‘충열’이란 현판을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 왔으며 인조 때 지어졌다. 충무공이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이 한 때 이곳에 모셔졌는데 인조 10년(1632) 유림들이 옛 터에 작은 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최초의 사당이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60년이 되던 효종 9년(1658)에 좁고 초라한 옛집을 헐고 새집을 지었다. 그 후 현종 4년(1663)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

남해충렬사는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노량충렬사라고도 한다.

통영의 충렬사와 함께 ‘충열’이란 현판을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 왔으며 인조 때 지어졌다. 충무공이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이 한 때 이곳에 모셔졌는데 인조 10년(1632) 유림들이 옛 터에 작은 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최초의 사당이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60년이 되던 효종 9년(1658)에 좁고 초라한 옛집을 헐고 새집을 지었다. 그 후 현종 4년(1663)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려준 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기록한 충무이공묘비가 사당 곁에 있으며, 비문은 현종 2년(1661)에 송시열이 썼고, 1663년에 박경지 등이 세운 것이다.

옛날에는 이 사당 곁에 호충암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화방사의 승려 10명과 승장 1명이 번갈아 와서 사당을 지켰다고 한다. 또한 공이 죽은 후 자운이란 승려가 공을 사모하여 쌀 수백섬을 싣고 와서 공을 위해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자운은 원래 충무공의 밑에 있던 승병이었다. 충렬사는 충무공의 노량 앞바다를 지키고 있는 수호신의 사당이라 할 수 있다.

경내에는 비각·내삼문·외삼문·관리사 등이 있고 사당 뒤의 정원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임시 묻었던 자리에 묘가 남아 있으며, 1948년 정인보가 쓴 충열사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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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남해대교
위치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자료.사진출처 남해군문화관광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수교! 잿빛옷을 벗고 붉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남해의 관문은 동양 최대의 현수교라 불렸던 남해대교이다. 하동과 남해를 잇는 남해대교는 길이 660m, 높이 80m의 아름다운 현수교로 1973년 개통된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일컬어지고 있다. 남해대교가 가로지른 노량해협의 거센 물살은 남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산 증인이요, 역사의 마당이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시작된 곳으로,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수교! 잿빛옷을 벗고 붉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남해의 관문은 동양 최대의 현수교라 불렸던 남해대교이다. 하동과 남해를 잇는 남해대교는 길이 660m, 높이 80m의 아름다운 현수교로 1973년 개통된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일컬어지고 있다.


남해대교가 가로지른 노량해협의 거센 물살은 남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산 증인이요, 역사의 마당이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시작된 곳으로, 또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무수한 유배객들이 자신의 적소로 건너오기 위해 나룻배를 탔던 한맺힌 곳이었다.
 

남해대교가 놓여지기 전, 남해사람들은 나룻배를 타거나 도선으로 노량의 물살을 가로질러 다녀야 했지만 30년전부터는 승용차로 1~2분이면 거뜬히 물을 건너온다.
 

남해를 육지와 연결한 남해대교를 건너면 벚꽃터널이 반겨준다. 봄이면 하늘이 보이지 않는 벚꽃의 터널이 장관이다.
 

남해대교는 태어날 때부터 짙붉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부식을 이유로 잿빛옷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2003년 산뜻한 선홍색빛으로 새단장을 하여 창선·삼천포대교와 함께 섬으로 가는 남해군 최고 관광자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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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이순신 영상관
위치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107
연락처 055-860-3786
자료.사진출처 남해군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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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유배문학관
위치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남해대로 2745
자료.사진출처 남해군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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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흥선대원군 척화비
위치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410-18
자료.사진출처 남해군문화관광
척화비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 각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낮은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맨 위에 지붕돌을 올려놓아 다른 척화비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는 당시 대원군의 명으로 척화비를 곳곳에 세우자, 이 지역의 관청에서 그것을 본 떠 세우면서 양식을 달리 한 것으로 보인다.척화비를 일제히 세우던 고종 8년(1871)에 함께 세운 것으로,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세계 각국과의..

척화비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 각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낮은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맨 위에 지붕돌을 올려놓아 다른 척화비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는 당시 대원군의 명으로 척화비를 곳곳에 세우자, 이 지역의 관청에서 그것을 본 떠 세우면서 양식을 달리 한 것으로 보인다.척화비를 일제히 세우던 고종 8년(1871)에 함께 세운 것으로,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세계 각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비들이 철거되었으나, 이 비처럼 몇기의 비들이 여전히 남아 그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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