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김유신묘
종목 사적 제21호
시대 통일신라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교과서여행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이다.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 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이다.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 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무덤 주위의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으로, 성덕왕릉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興德王)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의 비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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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태종무열왕릉
종목 사적 제20호
시대 삼국시대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교과서여행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으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으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장식이 소박한 편으로 무덤 주위에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 동북쪽에는 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가치가 있으며 1972∼1973년에 주변을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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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첨성대
종목 국보 제31호
시대 신라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높이 9.17m의 원통형 모양을 하고 있는 천문관측대로 불리고 있다. 첨성대에 관한 주장은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 오늘날 기상청과 같이 천문을 관측하던 관청 내부의 상징물 등 이견이 분분하나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던 천문대라는 주장이 가장 많다.1) 첨성대는 왜 만들었나? - 신라사람들의 생계수단은 대부분이 농사이다. 따라서 천문을 관측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아주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며 왕은 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높이 9.17m의 원통형 모양을 하고 있는 천문관측대로 불리고 있다. 첨성대에 관한 주장은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 오늘날 기상청과 같이 천문을 관측하던 관청 내부의 상징물 등 이견이 분분하나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던 천문대라는 주장이 가장 많다.

1) 첨성대는 왜 만들었나? - 신라사람들의 생계수단은 대부분이 농사이다. 따라서 천문을 관측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아주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며 왕은 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여자로서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던 선덕여왕에게는 왕권강화가 절실했으며 백성들을 위함과 부합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를 만든 정확한 년도 등 기록은 없으나 선덕여왕 재위 동안 만들었다는 삼국유사 기록과 선덕여왕 재위이후 천문관측 기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 선덕여왕때 만들어진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진 첨성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신라인의 우주관을 담고 있다.

2) 천문대는 산에 있어야 하는데... -  현재 천문대는 높은 산의 정상에 위치해 있다. 이는 대기오염으로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고 도시의 밝은 불빛들이 별을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시대 밤하늘엔 공기의 오염도 밝은 불빛도 없었으니 평지라도 별을 관측하는데 불편한 것이 없었다. 또한 관측 결과를 임금에게 보고하고 임금은 이를 백성들에게 알려 농사에 도움을 주고자 했기에 산에 위치해 있으면 보고 시간도 늘어나고 그만큼 정보 전달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임금이 사는 궁궐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3) 첨성대는 어떻게 구성됐나? - 첨성대는 기단부, 원주부, 정자부 이렇게 3부분으로 구성이 돼 있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신라시대 우주관인‘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석굴암 건축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첨성대도 기단부는 네모로 원주부는 둥글게 만들어 천원지방 사상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4) 어떻게 별을 관측하나? - 지상에서 남쪽 창으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 12단까지 돌과 자갈로 채워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안에서 19, 20단에 걸쳐진 정자석(井字石)에 다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25, 26단의 정자석까지 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 27단에 반원 모양의 널다란 돌이 놓여있고 그 위에 앉아 별을 관측했다.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구실을 하였던 기구인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별을 관측해 24절기를 측정하였으며 별을 관측하던 기구를‘망통’이라 하며 관측하는 사람을‘일관’이라 불렀다.

5) 첨성대가 의미하는 것 - 첨성대는 선덕여왕 재위시설 만들어져 1300여년간 신라의 하늘을 바쳐왔는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으며 처음 만들 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천문대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 둥근 원통형의 원주부는 모두 27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출입구로 알려진 남쪽창이 중앙 3단에 걸쳐 있으며 나머지 24단이 1년의 24절기를, 아래 위 12단이 1년 12달을, 세는 사람에 따라 돌의 개수가 362개 음력의 날수와 일치하는 등 천문관측과 관련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정자부의 각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 네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며 남쪽 창은 임금이 살던 월성 쪽이다.

5) 1300여년간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 경주는 지진대가 지나는 불안정한 지형으로 예로부터 지진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많다. 그 중 한 기록은 지진으로 인해 2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기록이 전해질만큼 큰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데 첨성대는 어떻게 그 지진을 견딜 수 있었나? 한마디로 잘 만들었기 때문이다. 첨성대 아래로 1.5m 정도 땅을 잘 다진 후 2단의 기단을 설치하고 돌들을 원통형으로 쌓았는데 이 돌을 쌓을 때 직각으로 쌓지 않고 안쪽으로 기울게 들여쌓기를 한 후 안을 채워 무너질 수 없는 구조로 만들었다. 그리고 19, 20단과 25, 26단에 정자석을 질러 돌들을 붙잡는 역할을 해 돌을 붙이는 접착제나 이음쇠가 없이도 강한 지진에 잘 견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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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석빙고)
종목 보물 제66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월성의 허물어진 성벽사이로 난 길을 지나 언덕 위 서쪽으로 100m 쯤 걸으면 둔덕 위에 돌로써 만든 자그마한 우진각 지붕을 얹은 환기통 3개가 보이는 곳이 조선시대에 만든 석빙고다. 동쪽은 돌과 흙담으로 가려져 있고 서쪽과 남쪽 앞은 트이어 있다.몇 년 전까지는 남쪽으로도 담이 둘러 있었다. 사람 키 정도인 1.75m 높이에 2m 너비로 된 입구에서 두 계단 내려서면, 조금 좁고 낮은 입구가 또 있어, 지금은 쇠막대기로 문을 만들어 놓았다. 그 속은 낮게 돼 있고 돌계단으로 내려간다. 문 가까이에서 한참을 들여다봐야 내부가 보..

월성의 허물어진 성벽사이로 난 길을 지나 언덕 위 서쪽으로 100m 쯤 걸으면 둔덕 위에 돌로써 만든 자그마한 우진각 지붕을 얹은 환기통 3개가 보이는 곳이 조선시대에 만든 석빙고다. 동쪽은 돌과 흙담으로 가려져 있고 서쪽과 남쪽 앞은 트이어 있다.

몇 년 전까지는 남쪽으로도 담이 둘러 있었다. 사람 키 정도인 1.75m 높이에 2m 너비로 된 입구에서 두 계단 내려서면, 조금 좁고 낮은 입구가 또 있어, 지금은 쇠막대기로 문을 만들어 놓았다. 그 속은 낮게 돼 있고 돌계단으로 내려간다. 문 가까이에서 한참을 들여다봐야 내부가 보이는데, 1,000여 개의 돌로 너비 5.76m, 높이 5.45m, 길이 12m 되게, 바닥은 흙이고, 그 위는 돌을 쌓아 천정을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朗), 즉 5개의 아치형으로 짜 만들었다. 출입구 앞 머릿돌에 음각으로, 석빙고(石氷庫)라고 씌어있다.

석빙고는 신라시대 만든 냉장고인데 임금이 여름에 시원한 음식을 먹으려고 얼음을 넣어 뒀던 얼음 창고다. 『삼국사기』에 보면, 지증왕이 505년 '겨울에 얼음을 저장해 두었다가 여름에 쓰라.'고 명령하였다 했고, 여기는 신라 궁궐터니까 이 석빙고는 신라시대 것이리라, 대부분 이렇게 알고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신라 22대 지증왕 때, 얼음 저장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그 저장소는 알 길이 없고, 월성에 있는 이 석빙고는 조선시대 영조 때, 처음 만들었다가 3년만에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는 말이 맞다.

조선시대에 왜 고을마다 얼음을 저장했는가 하면, 한마디로 약재(藥材)로 쓰기 위한 것이다. 즉 여름철에 열병이 돌아 몸이 불덩이 같이 열이 날 때, 그 열을 식히기 위한 얼음찜질용이다.

또 한가지 용도는 여름에 사람이 죽었을 때, 시체의 부패를 최소화하는 물품으로 얼음을 썼다. 집안 지체의 높낮이에 따라 계급의 고하에 따라 분배량이 달랐다고 한다. 그러니 오늘날 집집마다 있는 냉장고와 같이 음식을 저장하고 차게 하는 용도로서의 생활용품이 아니었다는 거다.

한 겨울에 얼음이 가장 두껍게 얼었을 때, 일정한 두께 이상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저장했다. 석빙고 바닥에 짚을 깔고 얼음을 한벌 놓고 사이사이에 짚과 등겨를 덮고, 다시 얼음을 재는 것을 반복했다. 조금씩 녹은 물은 빨리 빠져나가도록 뒤쪽으로 가면서 바닥이 낮게 돼 있고 맨 끝에는 물 빠지는 배수구를 만들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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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
종목 사적 제18호
시대 통일신라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삼국이 원수처럼 여기며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통일전쟁이 드디어 끝이 났다.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도 힘들었지만, 당과의 전쟁은 더욱 힘든 싸움이었다. 나당 전쟁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뭉치게 하고 그 힘으로 압록강과 원산만 이북으로 당을 몰아냈다.문무왕은 통일신라를 더욱 견고히 하고자 도성(都城) 밖을 지키는 나성(羅城)  을 세우고자 했다. 이때 왕사(王師) 지의법사의 다음과 같은 간언으로 기존의 산성을 개, 증축하여 수도 방어벽을 굳건히 하는데 힘을 쏟았다. "임금님께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

삼국이 원수처럼 여기며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통일전쟁이 드디어 끝이 났다.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도 힘들었지만, 당과의 전쟁은 더욱 힘든 싸움이었다. 나당 전쟁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뭉치게 하고 그 힘으로 압록강과 원산만 이북으로 당을 몰아냈다.

문무왕은 통일신라를 더욱 견고히 하고자 도성(都城) 밖을 지키는 나성(羅城)  을 세우고자 했다. 이때 왕사(王師) 지의법사의 다음과 같은 간언으로 기존의 산성을 개, 증축하여 수도 방어벽을 굳건히 하는데 힘을 쏟았다. "임금님께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땅에 금을 그어 놓아도 도적이 넘지를 못하고, 덕이 없으면 아무리 높은 성을 쌓아도 도적이 담을 넘을 것입니다. 이제 전쟁의 위험은 없어졌으니 나성의 건축은 마땅하지 않사옵니다."

한편 백제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문화와 고구려의 강하고 기상이 넘치는 문화에 감동된 왕은 월성(현, 반월성) 동쪽에 둘레 1,200m의 연못과 '임해전(臨海殿)'외 여러 전각을 짓고, 동궁(東宮)과 연회장으로 사용하게 했다. 세 개의 섬과 동쪽, 북쪽에 12봉우리를 만들어, 바다에 신선이 사는 형상인 삼신산(三神山)과 무산12봉(巫山十二峯)을 만들었다. 직선과 곡선이 겹쳐 굽이치는 호안은 작은 섬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한 곳에 서서 못의 크기를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백제, 고구려 문화와 신라의 감각이 하나로 어우러진 통일의 연못. 그 곳에서 파낸 흙으로 산을 만들고 동물들을 풀어 키우며, 나무와 화초를 심었다. 여러 개의 돌을 모아 쌓다가 한 개의 돌을 우뚝 솟게 하며, 드문드문 배치하는 등 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이다.
 
인공 연못인 월지는 물의 정화를 위해 물이 들어가는 입수구에 2단에 걸쳐 자연 정화장치를 설치했다. 깨끗한 물을 담기 위해 못 바닥에는 바다 자갈을 경사지게 깔아 입수구와 배수구 물의 흐름을 원만하게 했다.
 

수로를 따라 들어 온 물은 두 개의 수조에 차례대로 고였다가 넘쳐흘러 넓은 웅덩이에 다시 모인다. 웅덩이에 모인 물은 좁은 물길을 따라 흘러가다 두 단의 폭포로 떨어져 바다같은 못으로 힘차게 밀고 들어간다. 폭포 바로 앞 큰 섬이 물을 두 갈래로 갈라놓는다.

좌우로 갈라진 물은 구석지고, 깊숙한 곳까지 흘러 들어가 고여 있던 물을 밀어내고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밀려난 물이렁은 수면 곳곳에  '井'자형 나무틀 안에 심어진 부평초를 흔들어 대고, 구름 걸린 전각마저 흔들고 지나간다. 자연을 축소하여 별궁 정원에 들여 왕실과 나라의 안녕를 기원하는 신선의 바다를 담고, 민족문화의 융성기를 대표하던 월지는 경순왕의 눈물을 받아내며 쇠락의 길을 걷는다.
 

삼국사기 30대 신라 문무왕 14년(647) 2월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했으나 연못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신라 41대 헌덕왕조에 '태자를 월지궁에 거처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안압지(雁鴨池)'란 이름은 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하는데, 나라가 망하고 궁이 폐허가 되고 연못에는 오로지 오리와 기러기만 유유히 노닐고 있는 것을 조선시대 선비들이 보고 '안압지(雁鴨池)'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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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분황사
분류 불교유적
시대 신라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으로 3층만이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으로 3층만이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분황사 화쟁국사비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고려 숙종 6년(1101)에 만든 것으로,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 :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분황사 석정 
호국룡 설화가 전해지는 우물
분황사 사찰내에 마련되어 있는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 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시설해 놓은 모습으로,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물   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니,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설치된 우물로, 조선시대에 와서 불교억   압정책에 따라 사찰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   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며, 현재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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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태종무열왕릉비
종목 국보 제25호
시대 통일신라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교과서여행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위로 연꽃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머릿돌 좌우에는 6마리의 용이 3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 놓아 비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놓았다.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강한 인상을 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능숙하게 빚어낸 기법에서 당시 석조 조각의 발달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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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천마총
종목 제155호 고분
시대 신라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천마총은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천마도 장니 국보 207호)가 출토되어 붙은 이름으로 무덤 안에 들어가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와 죽은 사람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있는 지금의 풍습과 다른 점이다.천마총 발굴 이야기를 하자면, 1970년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큰 고분을 발굴한 경험이 없었다. 이전까지의 발굴은 일본인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기에 고분발굴의 축적된 경험, 기술, 사람 등이 없었기에 황남대총을 발굴할 자신감이 없었..

천마총은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천마도 장니 국보 207호)가 출토되어 붙은 이름으로 무덤 안에 들어가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와 죽은 사람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있는 지금의 풍습과 다른 점이다.

천마총 발굴 이야기를 하자면, 1970년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큰 고분을 발굴한 경험이 없었다. 이전까지의 발굴은 일본인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기에 고분발굴의 축적된 경험, 기술, 사람 등이 없었기에 황남대총을 발굴할 자신감이 없었다. 이때 발굴 경험과 기술을 익히기 위해 황남대총 옆에 있는 이름 없는 작은 고분을 시험 발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발굴결과는 예상밖에 대단한 것이었다. 정작 무덤의 주인이 2명인 황남대총보다, 더욱 화려한 황금유물 등 1만2천여점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옛 속담을 생각하게 되는 사건이다.

금관(국보 188호), 금모(국보 189호), 금제 과대 및 요패(국보 190호), 금제 접형관식(보물 617호), 금제 조익형관식(보물 618호), 경식(보물 619호), 유리배(보물 620호), 금동장 봉황 환두대도(보물 621호), 금동제 초두(보물 622호)등이 출토됐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천마도(국보 제2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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