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다산초당
종목 사적 제107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유배되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이름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유형원과 함께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쌓기도 했다. 정조가 죽자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유배되었고, 그 후 18년 간의 유배생활 동안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원형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곳에서 ..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유배되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이름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유형원과 함께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쌓기도 했다. 정조가 죽자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유배되었고, 그 후 18년 간의 유배생활 동안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원형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곳에서 11년 동안 머물면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측량’,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옛 초당은 무너져서 1958년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하여 건물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초당을 다시 지은 것이다. 작고 소박한 남향집으로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 뒤 언덕 암석에는 다산이 직접 깎은 ‘정석(丁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초당 왼쪽으로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앞 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청석’이 있고, 한 켠에는 ‘약천(藥泉)’이라는 약수터가 있어 당시 다산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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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다산유물전시관
위치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
사진.자료출처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강진군
다산기념관은 강진을 배경으로 펼쳐진 다산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만남/생애/환생/흔적 등의 테마에 맞춰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들이 패널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있습니다. 또한 영상실에서는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애니메이션이 상영됩니다.  

다산기념관은 강진을 배경으로 펼쳐진 다산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만남/생애/환생/흔적 등의 테마에 맞춰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들이 패널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있습니다. 또한 영상실에서는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애니메이션이 상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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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하멜기념관
위치 전남 강진군 병영면 병영성로 180
연락처 061-430-3318
자료.사진출처 강진문화관광
하멜기념관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하멜보고서』의 저자 헨드릭 하멜(Hendric Hamel)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강진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와의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위해 개관하였다. 타원형의 목조건축으로 지어진 왼쪽의 전시관은 하멜이 표착한 남도의 섬을 상징하며, 오른쪽 각진 형태의 건물은 망망대해에 표류한 조난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상징한다. 전시실은 『하멜보고서』를 비롯하여 하멜의 생애, 17세기 조선과 네덜란드의 사회·문화·역사적 상황, 그리고 강진군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의 자..

하멜기념관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하멜보고서』의 저자 헨드릭 하멜(Hendric Hamel)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강진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와의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위해 개관하였다.

타원형의 목조건축으로 지어진 왼쪽의 전시관은 하멜이 표착한 남도의 섬을 상징하며, 오른쪽 각진 형태의 건물은 망망대해에 표류한 조난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상징한다. 전시실은 『하멜보고서』를 비롯하여 하멜의 생애, 17세기 조선과 네덜란드의 사회·문화·역사적 상황, 그리고 강진군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의 자매결연 등 각 주제별로 감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있다. 하멜기념관은 1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 중 70여 점의 유물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하멜기념관은 하멜의 조선 표착의 역사적 의미 및 17세기 국제 교류사의 조사연구, 유물 전시를 통한 교육, 나아가 한국·네덜란드 간의 문화적 교류 증대를 위해 지역 전문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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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전라병영성
종목 사적 제397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강진문화관광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은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년) 갑오경장까지 조선조 500여 년간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이다. 그러나 1894년 갑오농민전쟁(동학)을 맞아 병화로 소실되었고, 이어 1895년 갑오경장의 신제도에 의해 폐영되고 말았다. 병영성 성곽의 총 길이는 1,060m이며, 높이는 3.5m, 면적은 93.139㎡(28.175평)인데, 현재 사적 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병영성 내의 당시 건물이나 유적은 소실되고 없으나 성곽은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의의를 고려하여..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은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년) 갑오경장까지 조선조 500여 년간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이다. 그러나 1894년 갑오농민전쟁(동학)을 맞아 병화로 소실되었고, 이어 1895년 갑오경장의 신제도에 의해 폐영되고 말았다.

병영성 성곽의 총 길이는 1,060m이며, 높이는 3.5m, 면적은 93.139㎡(28.175평)인데, 현재 사적 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병영성 내의 당시 건물이나 유적은 소실되고 없으나 성곽은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의의를 고려하여 2010년까지 정비할 계획으로 현재 복원 중이다. 특히 병영성은 서양에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소개했던 하멜이 1656년 강진 병영으로 유배되어 7년 동안 살면서 노역했던 곳으로서, 주변의 ‘하멜 기념관’과 함께 하멜 관련 역사문화 유적지로서의 역할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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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낙안읍성
종목 사적 제302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낙안 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 중 하나이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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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송광사
종목 사적 제506호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우리나라 삼보사찰(불보, 법보, 승보) 중 하나인 승보사찰로서 유명한 송광사는 신라말 ‘체징’이 길상사라는 소규모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어,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대찰로 중건된 후 고려부터 조선 초까지 16명의 국사가 배출된 곳이다. 경내에는 16국사의 진영을 봉안한 국보 제56호 ‘송광사국사전’ 등 3점, 보물 12점 등 다수의 중요문화재와 국사의 부도를 모신 암자가 위치하여 역사적·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크다...

우리나라 삼보사찰(불보, 법보, 승보) 중 하나인 승보사찰로서 유명한 송광사는 신라말 ‘체징’이 길상사라는 소규모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어,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대찰로 중건된 후 고려부터 조선 초까지 16명의 국사가 배출된 곳이다.

경내에는 16국사의 진영을 봉안한 국보 제56호 ‘송광사국사전’ 등 3점, 보물 12점 등 다수의 중요문화재와 국사의 부도를 모신 암자가 위치하여 역사적·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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