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대성동고분박물관
위치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26
자료.사진출처 대성동고분박물관
홈페이지 http://ds.gimhae.go.kr/main/
 



















 

Read More

김해 대성동고분군
종목 사적 제341호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와 김해공설운동장 사이의 동서로 뻗은 구릉지대에 있는 가야의 무덤들이다. 길이 약 300m, 높이 20m정도의 구릉 지대로, 경사가 완만해 무덤이 있기에 매우 적합하다. 현재 구릉의 정상 일부분을 제외한 주변의 경사지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발굴조사 결과 1∼5세기에 걸친 지배집단의 무덤 자리로 고인돌을 비롯하여 널무덤(토광묘), 덧널무덤(토광목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등 가야의 여러 형식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구릉 주변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고, 구릉 정상부에는 4&..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와 김해공설운동장 사이의 동서로 뻗은 구릉지대에 있는 가야의 무덤들이다. 길이 약 300m, 높이 20m정도의 구릉 지대로, 경사가 완만해 무덤이 있기에 매우 적합하다. 현재 구릉의 정상 일부분을 제외한 주변의 경사지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발굴조사 결과 1∼5세기에 걸친 지배집단의 무덤 자리로 고인돌을 비롯하여 널무덤(토광묘), 덧널무덤(토광목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등 가야의 여러 형식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구릉 주변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고, 구릉 정상부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어, 삼한시대 구야국 단계에서 금관가야 시기까지의 무덤이 발견되고 있다.

덧널무덤은 나무판을 조립하여 널(관)을 만든 것으로, 이전에 통나무관을 이용하던 것에서 나무판널을 사용하는 시기로의 전환이 1세기경임을 보여준다. 유물로는 토기류와 철기류, 목류, 중국제 거울 등이 출토되었다.

우리나라 고대무덤 형식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며, 중국제 거울이나 토기류에서 한·중·일의 문화교류 상황을 밝혀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Read More

김해 봉화동 유적
종목 사적 제2호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패총은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져 쌓여 있는 곳으로, ‘조개더미’라고도 하며 당시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 봉황대 언덕 근처에 서로 시기가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와 다양한 무덤유적이 있다.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 뼈·뿔도구, 석기, 가락바퀴(방추차), 불탄쌀(탄화미), 중국 화폐인 화천, 동물뼈 들이 나왔다. 토기는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띠며, 사슴뿔이나 뼈를 가공해 만든 칼자루가 많다. 불탄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천은 ..

패총은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져 쌓여 있는 곳으로, ‘조개더미’라고도 하며 당시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

봉황대 언덕 근처에 서로 시기가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와 다양한 무덤유적이 있다.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 뼈·뿔도구, 석기, 가락바퀴(방추차), 불탄쌀(탄화미), 중국 화폐인 화천, 동물뼈 들이 나왔다. 토기는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띠며, 사슴뿔이나 뼈를 가공해 만든 칼자루가 많다. 불탄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천은 중국 신(新)나라의 왕망이 기원전 14년에 만든 화폐로 유적이 형성된 연대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중국과의 왕래도 짐작하게 한다.

조개더미의 동쪽에서 고인돌, 항아리에 뼈를 넣었던 독무덤(옹관묘), 집터가 발견되었다. 무덤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1∼4세기경 생활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다

Read More

김해 봉황동유적 패총전시관
위치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 253번지
자료.사진출처 김해문화관광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의 발굴이 이루어진 유적으로써 유물 등을 토대로 가야시대 당시 생활환경 및 국제관계, 문화 등을 밝혀냄으로써 가야의 실체를 규명하였다. 김해 봉황동유적(사적 제2호)은 1907년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의 발굴조사로 유명한 회현리패총(사적 제2호, 1963. 1. 21. 지정)과 봉황대유적(옛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 1983. 12. 20. 지정)이 동일 성격의 유적임을 감안, 이들 유적을 통합해 2001년 2월 5일 사적 제2호로 확대 지정한 것이다. 금관가야의 중심 유적으로 1907년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누차..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의 발굴이 이루어진 유적으로써 유물 등을 토대로 가야시대 당시 생활환경 및 국제관계, 문화 등을 밝혀냄으로써 가야의 실체를 규명하였다.

김해 봉황동유적(사적 제2호)은 1907년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의 발굴조사로 유명한 회현리패총(사적 제2호, 1963. 1. 21. 지정)과 봉황대유적(옛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 1983. 12. 20. 지정)이 동일 성격의 유적임을 감안, 이들 유적을 통합해 2001년 2월 5일 사적 제2호로 확대 지정한 것이다.

금관가야의 중심 유적으로 1907년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누차에 걸친 발굴조사의 성과를 통해 가야의 생활과 문화, 사회상, 국제관계 등 그 실체를 보다 명료하게 밝힐 수 있었다. 김해 봉황동(회현리)패총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봉황대 구릉의 동남단에 위치한다. 봉황대 구릉 상부에 위치한 패총은 비교적 정연한 층위 상태를 보이지만 이 부분의 패총은 여러 시기의 문화층이 뒤섞여 있다.

아마도 비, 바람 등의 자연적 여건과 골짜기로 연결된 급경사면에 위치한 지형적 조건 때문에 반복적으로 층위가 뒤집히는 현상이 생긴 것 같다. 출토유물을 통해 살펴볼 때 대체로 기원전후한 시기부터 4세기 대에 걸쳐 형성된 패총이지만 이러한 여건상 하나의 층위에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뒤섞여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패총에서는 당시 생활 및 문화활동에 사용했던 토기(주로 취사용), 골각패제품(복골, 골촉, 침, 소형칼자루, 장신구 등), 국제교류와 관련한 중국계유물(화천, 청동경), 일본계유물(야요이토기, 하지키) 등 다양한 인공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또한 식생활과 관련한 탄화미, 동물뼈(상어, 돔, 고래, 거북, 기러기, 오리, 꿩, 닭, 멧돼지, 사슴, 노루, 개, 소, 말 등), 패각(굴, 꼬막, 담치, 홍합, 소라, 고동, 백합, 다슬기 등) 등 다양한 자연유물도 같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 풍습과 자연환경 등의 해명에 중요한 근거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봉황동유적 패총전시관은 건축면적 59㎡로써 발굴면을 그대로 전사하여 전시함으로써 현장감을 더해주며 교육효과도 높다. 또한 패총 관련 내용을 각종 안내판 등을 통해 상세히 설명해주고 경관조명을 통해 도시경관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켰다.

Read More

김해 김수로왕릉
종목 사적 제73호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 부른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무덤의 높이는 5m의 원형 봉토무덤인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문..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 부른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무덤의 높이는 5m의 원형 봉토무덤인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했던 듯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다.

『지봉유설(芝峰類洩)』기록에 따른다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Read More

김해 파사석탑
종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수로왕의 비 허왕후, 黃玉이 東漢建武 24년 갑신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머나먼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함께싣고 왔다고 삼국유사 등 고서에 기록되어 있음. 파사석탑은 옛 호계사 자리에 있던 것을 김해부사 정현석이 본탑은 허왕후께서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왕후 곁에 두어야 한다며 옮겼음.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이 시집을 오면서 불교를 전래하고 형제인 허보옥 즉, 장유화상이 가락국에 와서 대국승으로 활약하였다고 함. 탑은 네모진 사면의 오층이고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은 조금 붉은 ..

수로왕의 비 허왕후, 黃玉이 東漢建武 24년 갑신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머나먼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함께싣고 왔다고 삼국유사 등 고서에 기록되어 있음. 파사석탑은 옛 호계사 자리에 있던 것을 김해부사 정현석이 본탑은 허왕후께서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왕후 곁에 두어야 한다며 옮겼음.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이 시집을 오면서 불교를 전래하고 형제인 허보옥 즉, 장유화상이 가락국에 와서 대국승으로 활약하였다고 함. 탑은 네모진 사면의 오층이고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은 조금 붉은 빛의 옥문무늬가 있고 질도 달라 우리나라의 類가아님. 닭 벼슬피에 가루로 만든 파사석과 일반석으로 실험한 결과 파사석 부분은 물기가 계속 남아 있는 반면 일반석은 건조하여 말라버렸다고 함.

Read More

김해 김수로왕비릉
위치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120번지
자료.사진출처 김해문화관광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에 있는 가야시대의 능묘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왕후의 왕비릉(王妃陵-국가사적 제 74호)이다. 대형의 원형 토분이며 특별한 시설은 없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을 둘렀다. 능 앞에는 1647년(인조 25)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 )'이라고 2행으로 각자(刻字)한 능비가 있다. 허왕후가 배를 타고 시집 올때 바람과 풍랑을 잠재웠다는 유래가 얽힌 파사석탑(婆娑石塔)이 흥미롭..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에 있는 가야시대의 능묘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왕후의 왕비릉(王妃陵-국가사적 제 74호)이다. 대형의 원형 토분이며 특별한 시설은 없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을 둘렀다. 능 앞에는 1647년(인조 25)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 )'이라고 2행으로 각자(刻字)한 능비가 있다. 허왕후가 배를 타고 시집 올때 바람과 풍랑을 잠재웠다는 유래가 얽힌 파사석탑(婆娑石塔)이 흥미롭다. 허왕후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열 아들 중 두 아들에게 자신의 성인 허씨를 따르게 하여 김해 허씨 성이 유래되었고, 그로 인해 김해 김씨와 허씨는 혼인이 금지되어 왔다고 한다.

허왕후의 등장은 앞선 철기문화로 세계와 교류했다는 가야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삼국유사』에는 이 일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48년 7월 27일에 신하들이 수로왕에게 왕비를 얻을 것을 청한다. 그러자 왕은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나의 배필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이니 염려 말라." 라고 답하며 해안 쪽으로 사람들 보낸다. 그때 갑자기 붉은 돛과 붉은 기를 휘날리며 한척의 배가 다가온다. 왕은 신하를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려 하지만 배 안의 왕비는 모르는 이를 따라 갈 수 없다 한다. 그러자 왕은 대궐 밖에 장막을 치고 기다린다. 왕비도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에게 바친다.
왕비가 여러 사람들과 보화를 가지고 행궁으로 다가가니 왕은 그녀를 맞이한다. 그리고 가야에 오게 된 연유를 이야기 한다.
자신은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인데 부모님들께서 꿈에 상제님을 보았는데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라고 하여 가락국으로 오게 된 사연과 배를 타고 오다 수신의 노함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다시 돌아가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무사히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후 허왕후는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다했다. 백성들은 왕비를 잊지 못해 왕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陵峴),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또 가락국의 질지왕은 452년 왕과 왕비가 혼례를 치른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허왕후를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쌍어문(雙漁文)이다. 가락국의 국장(國章)이자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된 쌍어문은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물고기가 인간을 보호하는 영특한 존재로 여겨 사용하던 문장이다. 이후 인도에 전파되고, 힌두교의 여러 신상(神像)중에 하나가 되어 널리 사용된다.

이러한 쌍어문이 가락국의 국장이 된 것은 허왕후가 이 땅에 시집오며 소개한 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장유화상이 허왕후의 오라버니라면 아유타국의 왕자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때문에 장유화상의 가락국 도착은 인도 신앙 내지는 인도종교가 한국에 도착한 중요한 증거가 된다.

지금도 가야의 옛땅이었던 경남의 여러 불교사원에는 쌍어문이 남아있다. 김해의 은하사, 계원암, 합천의 영암사에 쌍어문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있다. 쌍어신앙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선비들이 사용하던 묵(墨)에도 그려지고, 여인네들의 노리개에도 달리게 되었다. 이천년 전 한 여인의 국제결혼이 이렇게 지금까지도 우리문화속에 살아 숨쉬는 현실을 보여준다.

Read More

김해 국립김해박물관
위치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
자료.사진출처 김해국립박물관
홈페이지 http://gimhae.museum.go.kr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