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국회의사당
위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 국회의사당
자료.사진출처 한국중앙연구원
홈페이지 http://www.assembly.go.kr/assm/userMain/main.do
본회의장과 위원회 회의실을 비롯하여 국회기관인 의장실·부의장실·교섭단체실과 소속기관인 국회사무처·국회도서관 및 부속시설인 의장공관·의원회관 등의 건물을 말한다. 현재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의 1에 있다. 여의도를 횡단하는 너비 200m의 5·16광장에서 서북쪽으로 뚫린 도로를 통해 마주 바라보아 정면에 의사당 본관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국회도서관, 왼쪽에는 의원회관이 자리잡고 있어서 조형과 규모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되어 있다. 의사당 본관은 정면에..

본회의장과 위원회 회의실을 비롯하여 국회기관인 의장실·부의장실·교섭단체실과 소속기관인 국회사무처·국회도서관 및 부속시설인 의장공관·의원회관 등의 건물을 말한다.

현재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의 1에 있다. 여의도를 횡단하는 너비 200m의 5·16광장에서 서북쪽으로 뚫린 도로를 통해 마주 바라보아 정면에 의사당 본관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국회도서관, 왼쪽에는 의원회관이 자리잡고 있어서 조형과 규모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되어 있다.

의사당 본관은 정면에서 볼 때 화강석으로 된 너비 50m의 대계단과 기단 위에 높이 32.5m의 대열주(大列柱) 24개를 세워 건축되었다. 열주는 경회루의 석주를 본뜬 것으로, 24절기를 상징하는 동시에 국민들의 대립된 다양한 의견을 상징한 것이라 한다. 열주에 받쳐져 처마가 있고, 그 위에는 밑지름 64m의 돔이 있어 지붕을 이룬다.

돔은 원만한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의회정치의 본질을 상징한 것으로 건물에 안정감과 웅장미를 더하여준다. 총 대지면적은 33만㎡ (10만평)이고, 지하 2층, 지상 6층의 건물로(한층의 높이는 5.2∼6.5m) 지반에서 기단면까지는 5.44m, 기단면에서 돔 상단까지는 63. 75m, 연건평은 8만 1444㎡ (2만 4680평)이다.

의사당은 국회양원제의 실시에 대비하여 두 개의 대형 회의장이 있는데, 현재의 본회의장은 민의원 본회의장으로 쓰일 수 있는 것으로 950㎡(288평)이며, 의석은 이동식으로 4백석까지 확장이 가능하고 방청석은 350석, 기자석은 80석이다.

한편, 현재의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회의실은 참의원 본회의장으로 쓰일 수 있는 것으로 의석 1백석, 방청석 250석, 기자석 40석이다.

양원 본회의장은 사방 40m인 ‘로턴다 홀’의 좌우 양측에 위치하고 홀의 천장 돔까지 장쾌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의사당 전체의 구심적 대공간을 형성한다.

홀의 네 귀에는 좌대가 놓여서 장차 국가의 중흥에 기여한 지도자의 동상을 건립할 수 있도록 했다. 홀의 대리석바닥, 각층 발코니의 난간, 그릴 등은 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문양 중에서 전아(典雅:사물이 격에 맞아 고상하고 우아하다)한 고유의 문양을 현대화한 도안으로 되어 있다.

바닥은 신라의 와당문양 중에서 길하다는 무늬를 사용하여 전국행정구역을 나타낸 도안으로서 단합을 상징하며, 석굴암 천장궁륭(활이나 무지개같이 높고 길게 굽은 형상으로 만들어진 천장)의 모양을 응용하여 주위를 깔고 외부선에는 조선시대의 내부장식에 많이 쓰인 띠문을 현대식으로 장식하였고, 난간은 근정전 꽃살무늬 창구를 현대식으로 표현하였다.

홀은 필요에 따라 옥내행사나 기념축연 등에 사용할 수 있는 크기로 하였으며, 의원식당과 로비로 통한다. 본회의장의 의석배치는 의장단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하고 의장단 오른쪽에는 의석과 나란히 국무위원석이 있다.

한편, 부속건물과 시설로서 의장공관은 의사당 본관 정면의 오른쪽에 위치하며 지하 1층, 지상 2층 구조로서 건물높이 7. 8m, 연건평 1,264㎡(383평)이다.

의원회관은 의사당 본관 정면의 도로 건너편 왼쪽에 건립된 아파트 5동을 매입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각 동 모두 5층으로 연건평 6,725㎡(2,038평)이다. 기타 부속건물로 경비대 건물과 차량정비고·온실이 있다.

경비대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연건평 1,495㎡(453평)이고, 차량정비고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연건평 1,043㎡ (316평)이며, 온실은 241㎡(73평)이다.

그 동안 우리 나라의 국회의사당은 처음 제헌국회가 개원된 1948년 5월 31일부터 1950년 6월 27일까지는 서울 세종로 중앙청 중앙홀이 의사당으로 사용되다가, 6·25전쟁으로 남하한 국회는 임시수도였던 대구에서 문화극장을 임시의사당으로 사용하여 이곳에서 1950년 7월 27일부터 8월 17일까지 임시회를 개최하였다.

전세가 악화되어 정부와 함께 부산으로 이동한 국회는 그 해 10월 6일까지 부산시 문화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서울이 수복되고 정부가 서울로 귀환하자 국회도 다시 중앙청 중앙홀을 그 해 11월 26일까지 사용하다가, 12월 8일부터 1951년 1월 3일까지 서울 태평로 시민회관 별관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1·4후퇴로 정부가 다시 부산으로 남하하자 국회는 1951년 1월 4일부터 부산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고, 6월 27일부터는 경상남도청 무덕전을 1953년 8월의 서울 환도 때까지 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서울로 환도한 국회는 1953년 9월 27일부터 1954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날 때까지 중앙청 중앙홀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으며, 제3대 국회가 개원한 1954년 6월 9일부터 1975년 9월까지 다시 태평로 시민회관 별관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고, 양원제가 실시된 제5대국회 때 참의원은 서울 시청 뒤 대한공론사를 의사당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75년 9월 1일에 현재의 여의도 의사당이 준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의사당 건물은 1968년 제7대 국회에서 의사당 부지를 선정한 뒤 1969년 7월 17일 제헌절을 맞아 기공식을 가졌다.

공사기간 6년 동안의 총공사비는 135억 원으로 시멘트 64만 부대, 벽돌 850만 장이 들었으며, 연인원 1백만 명이 투입된 대역사로 이루어졌다.

현재 국회의원 이외에 의원보좌관·비서·사무처직원 등 2천2백여 명이 이용하고 있다. 한편, 국회의사당은 잘 정리된 주위의 조경과 회색의 화강석 건물이 조화를 이루어 매년 2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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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복궁
종목 사적 제117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으로 태조 4년(1395)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다. 궁궐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으로 태조 4년(1395)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다.

궁궐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경회루 남측의 궐내각사 권역에 집현전을 짓고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또한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궐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지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궁궐의 대부분을 훼손함에 따라 점차 궁궐의 제 모습을 잃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궐 안에 남아있던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함화당·집경당·향원정·집옥재·협길당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전해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궐의 왼쪽(동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서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제도인데, 이러한 형식은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으로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법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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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와대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
자료.사진출처 두산백과(네이버)
홈페이지 http://www.president.go.kr/
청와대는 대통령의 집무실·접견실·회의실 및 주거실 등이 있는 본관과 비서실·경호실·춘추관·영빈관 등 부속건물로 되어 있고 넓은 정원과 북악산(北岳山)으로 이어지는 후원(後園) 및 연못이 있다. 본관은 2층 화강암 석조에 청기와[靑瓦]를 덮어 ‘청와대’란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 곳은 일찍이 고려시대에 남경(南京)으로서의 별궁(別宮)이 있던 터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26년(세종 8) 경복궁(景福宮)을 창건하면서 궁궐 후원으로 삼아 이 곳에 연무장(鍊武場), 융무당(..

청와대는 대통령의 집무실·접견실·회의실 및 주거실 등이 있는 본관과 비서실·경호실·춘추관·영빈관 등 부속건물로 되어 있고 넓은 정원과 북악산(北岳山)으로 이어지는 후원(後園) 및 연못이 있다. 본관은 2층 화강암 석조에 청기와[靑瓦]를 덮어 ‘청와대’란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 곳은 일찍이 고려시대에 남경(南京)으로서의 별궁(別宮)이 있던 터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26년(세종 8) 경복궁(景福宮)을 창건하면서 궁궐 후원으로 삼아 이 곳에 연무장(鍊武場), 융무당(隆武堂), 경농재(慶農齋) 및 과거장(科擧場)이 마련되었으며, 왕의 친경지(親耕地)로도 사용되었다.

그 후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안에 청사(廳舍)를 신축하면서 1927년 오운각(五雲閣) 외의 모든 건물과 시설을 철거하고 총독관저를 이 곳에 지었다. 청와대 본관은 바로 이 때 건축한 것이다.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미군정이 시작되자 이 곳은 그대로 군정(軍政)장관의 관저로 사용되었으며,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면서 ‘경무대(景武臺)’라고 불렀다. 그 후 1960년 4월 4·19혁명 후 민주당정권이 들어서면서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이 경무대의 주인이 되자 곧 ‘청와대’로 개칭하였고, 1990년 프레스센터인 춘추관과 대통령 관저가 신축되었다. 1993년 8월 대통령 김영삼(金泳三)의 지시로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이 기거하였던 구관은 철거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와대 [靑瓦臺]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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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사동
위치 서울시 종로구
자료.사진출처 문화지구 인사동
홈페이지 http://www.hiin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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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위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자료.사진출처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홈페이지 http://www.sscm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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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운현궁
위치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64
자료.사진출처 운현궁관리사무소
홈페이지 http://www.unhyeongung.or.kr/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기도 하다. 운현궁은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기도 하다. 운현궁은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철종 때 옛 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하였으며, 고종이 등극한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다시 확장하였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었으며, 서운관은 세조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다. 서운관의 명칭인 운관(雲觀)과 운관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 운현(雲峴)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고종의 잠저는 당시 대왕대비 교지를 받들어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김병익 등 일행이 명복(明福-고종의 이름)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토록 하기 위하여 고종을 맞이하러 최상급의 가마행렬을 갖추어 관현(觀峴)의 흥선군 사저에 갔을 때 흥선군의 위엄 있는 자세와 그의 둘째 아들인 명복의 천진스러웠던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서 운현궁이 고종의 잠저였음을 알 수 있다.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했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으나 그 해 9월 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양도 의사를 이청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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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탑골공원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99
자료.사진출처 두산백과
탑공원·탑동공원·파고다공원이라고도 하며,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1만 5,720㎡이다. 고려시대에는 흥복사(興福寺)가, 조선시대 전기(1464)에는 원각사(圓覺寺)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연산군이 원각사를 폐사하고 중종 때 건물이 모두 철거되면서 빈터만 남아 있다가, 1897년(광무 1) 영국인 고문 J.M.브라운이 설계하여 공원으로 꾸며졌다. 1919년 3·1운동의 발상지로 더욱 유서깊은 탑골공원은 현재 시민의 휴식광장으로 공개되어 있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

탑공원·탑동공원·파고다공원이라고도 하며,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1만 5,720㎡이다. 고려시대에는 흥복사(興福寺)가, 조선시대 전기(1464)에는 원각사(圓覺寺)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연산군이 원각사를 폐사하고 중종 때 건물이 모두 철거되면서 빈터만 남아 있다가, 1897년(광무 1) 영국인 고문 J.M.브라운이 설계하여 공원으로 꾸며졌다. 1919년 3·1운동의 발상지로 더욱 유서깊은 탑골공원은 현재 시민의 휴식광장으로 공개되어 있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2)·대원각사비(보물 3)·앙부일구(仰釜日晷:해시계) 받침돌(臺石) 등의 문화재와, 1980년에 제작 ·건립한 3·1운동기념탑·3·1운동벽화·의암(義庵) 손병희 동상(孫秉熙銅像:1966년 건립)·한용운(韓龍雲) 기념비(1967년 건립) 등이 있다.

서울시에서는 그 동안 공원의 북서쪽 둘레에 있던 파고다아케이드가 임대기간 만료로 철거됨에 따라 1983년 그 자리에 투시형 담장을 설치하고, 서문(西門)과 북문(北門) 등 사주문을 복원하였으며, 공원 부지도 확장·정비하여 조상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사적공원(史蹟公園)으로 면모를 일신시켰다. 1992년 이곳의 옛 지명을 따라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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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원각사지10층석탑
종목 국보 제2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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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종목 보물 제3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0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0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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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덕수궁
종목 사적 제124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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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와대 사랑채
위치 서울 종로구 효자로13
자료.사진출처 청와대 사랑채
홈페이지 http://cwdsarangcha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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