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불국사
종목 사적 제502호
시대 통일신라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울산으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 시내를 벗어나면 꽤 높은 산이 동편에 나타난다. 신라인들이 동악이라 부르며 신성시하던 토함산이다. 이 산에는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건립된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석굴암에서 동쪽 산비탈을 곧장 내려가면 장항리를 지나, 위대한 통일군주 문무대왕이 잠든 대왕암이 있는 동해로 이어진다. 일연 스님이 지은「삼국유사」에는 재상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만들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과연 재상의 신분으로 불국사와 석..

울산으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 시내를 벗어나면 꽤 높은 산이 동편에 나타난다. 신라인들이 동악이라 부르며 신성시하던 토함산이다. 이 산에는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건립된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

석굴암에서 동쪽 산비탈을 곧장 내려가면 장항리를 지나, 위대한 통일군주 문무대왕이 잠든 대왕암이 있는 동해로 이어진다. 일연 스님이 지은「삼국유사」에는 재상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만들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연 재상의 신분으로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큰 토목공사를 할 수 있는 재력이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경덕왕 때인 751년 공사를 시작해,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했다 한다. 총 공사기간은 24년이다.

 

부처님 나라를 만든 신라인의 자신감 - 불국사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자신감은 사람들이 사는 땅위에 부처님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로 표현된다. 신라사람들은 옛날부터 신성시 한 토함산에 부처님 나라를 만들었다. 불국사(佛國寺) 이름을 그대로 해석하면 부처님 나라가 된다.

불국사는 토함산 서쪽 경사진 곳에 축대를 쌓고 절을 세운 산지가람의 성격을 띠고 있다. 불국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천왕문을 통해 들어오면 정면에 보이는 백운교, 청운교, 자하문, 범영루, 좌경루가 있고 안쪽에는 석가탑, 다보탑, 무설전으로 구성된 대웅전영역과 이보다 조금 낮은 축대 위에 세워진 연화교, 칠보교, 안양문 등으로 구성된 극락전영역이다.

불국사를 정면에서 살펴보면 석가정토의 대웅전이 아미여래의 극락전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석가여래 상주 설법탑.
 

신라 삼층석탑의 기준 - 석가탑 (국보 21호)

석가탑(석가여래 상주 설법탑)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높이는 8.2m, 아무런 조각이 없는 2층 기단 위에 3층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양식이다. 석가탑은 통일신라 초기에 만들어진 감은사 탑과 고선사 탑이 지닌 무거운 석탑양식에서 벗어나 날씬한 비례를 적용함으로써 더욱 추상적이고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후 신라석탑의 기준이 된다. 1966년 석가탑을 해체하였을 때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왔다.

 


▲다보여래 상주 증명탑.
 

신라석공의 솜씨 자랑 - 다보탑 (국보 20호)

다보탑(다보여래 상주 증명탑)은 석가여래의 설법을 찬양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다보탑은 높이 10.4m로 석가탑 보다 조금 높다. 4개 계단이 있는 정사각형의 기단 위에 1층은 속이 보이게 네 기둥을 세웠고, 지붕은 사각으로 기와집의 처마를 달았다. 2층은 사각난간이 있고 지붕은 팔각이다.

3층은 팔각난간과 연꽃이 활짝 핀 원으로 된 지붕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도형을 통해 많은 변화를 주었다. 다보탑의 복잡하고 화려한 장식 및 독특한 구조와 표현법은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것으로 단단한 화강암을 이용해 목조건축처럼 만든 신라석공의 솜씨가 놀랍다.

대웅전영역을 하늘에서 보면 탑과 축대의 배치 또한 절묘하다. 단순 소박한 석가탑은 복잡 화려한 범영루 뒤에, 복잡 화려한 다보탑은 단순 소박한 좌경루 뒤에 두어 3차원적인 균형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지닌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범영루와 좌경루의 모습이 다르게 된다. 불국사 축대에는 건축의 기본원리인 좌우대칭의 미를 따르지 않는 독창적인 멋이 숨어 있다. 다보탑에는 돌사자가 한 마리 있는데 원래는 네 마리가 귀퉁이마다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 세 개는 사라지고 얼굴이 깨어진 한 마리만 남아 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 - 극락전 금동아미타불 (국보 27호)

연꽃다리와 일곱 보석다리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극락세계다. 이곳에는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금동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원만한 얼굴에 오른쪽 어깨는 가사를 벗었고 오른손은 가볍게 다리 위에 얹었다.

곧은 몸과 단정하고 인자한 얼굴 모습은 전체적으로 자비롭고 존엄한 느낌을 준다.
극락전 아미타불은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가장 크고 훌륭한 불상으로 비로전의 비로자나불과 백률사의 약사여래상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3대 금동불이라 불린다.


부처님의 본체 - 비로자나불 (국보 26호)

비로전은 관음전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곳에 있다. 화엄경 사상에 따르면 비로자나불은 모든 부처님의 본체로 ‘빛을 인간세계에 널리 비쳐 준다’는 뜻이다. 수인은 지권인으로 오른손은 부처의 세계를 표시하고 왼손은 중생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런 형상으로 손가락의 모습을 취하여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깊은 뜻을 나타낸다. 비로자나불의 얼굴 모습과 옷의 처리 등 세련된 수법은 지극히 아름다운 형상을 나타내어 신라인의 탁월한 솜씨를 보여 준다.
 


극락세계에 이르는 연꽃다리와 일곱 보석다리.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푸른 구름다리, 흰 구름다리.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

Read More

경주 김유신묘
종목 사적 제21호
시대 통일신라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교과서여행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이다.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 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이다.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 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무덤 주위의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으로, 성덕왕릉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興德王)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의 비만 남아있다.

Read More

경주 태종무열왕릉
종목 사적 제20호
시대 삼국시대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교과서여행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으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으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장식이 소박한 편으로 무덤 주위에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 동북쪽에는 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가치가 있으며 1972∼1973년에 주변을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Read More

경주 첨성대
종목 국보 제31호
시대 신라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높이 9.17m의 원통형 모양을 하고 있는 천문관측대로 불리고 있다. 첨성대에 관한 주장은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 오늘날 기상청과 같이 천문을 관측하던 관청 내부의 상징물 등 이견이 분분하나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던 천문대라는 주장이 가장 많다.1) 첨성대는 왜 만들었나? - 신라사람들의 생계수단은 대부분이 농사이다. 따라서 천문을 관측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아주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며 왕은 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높이 9.17m의 원통형 모양을 하고 있는 천문관측대로 불리고 있다. 첨성대에 관한 주장은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 오늘날 기상청과 같이 천문을 관측하던 관청 내부의 상징물 등 이견이 분분하나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던 천문대라는 주장이 가장 많다.

1) 첨성대는 왜 만들었나? - 신라사람들의 생계수단은 대부분이 농사이다. 따라서 천문을 관측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아주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며 왕은 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여자로서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던 선덕여왕에게는 왕권강화가 절실했으며 백성들을 위함과 부합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를 만든 정확한 년도 등 기록은 없으나 선덕여왕 재위 동안 만들었다는 삼국유사 기록과 선덕여왕 재위이후 천문관측 기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 선덕여왕때 만들어진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진 첨성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신라인의 우주관을 담고 있다.

2) 천문대는 산에 있어야 하는데... -  현재 천문대는 높은 산의 정상에 위치해 있다. 이는 대기오염으로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고 도시의 밝은 불빛들이 별을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시대 밤하늘엔 공기의 오염도 밝은 불빛도 없었으니 평지라도 별을 관측하는데 불편한 것이 없었다. 또한 관측 결과를 임금에게 보고하고 임금은 이를 백성들에게 알려 농사에 도움을 주고자 했기에 산에 위치해 있으면 보고 시간도 늘어나고 그만큼 정보 전달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임금이 사는 궁궐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3) 첨성대는 어떻게 구성됐나? - 첨성대는 기단부, 원주부, 정자부 이렇게 3부분으로 구성이 돼 있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신라시대 우주관인‘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석굴암 건축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첨성대도 기단부는 네모로 원주부는 둥글게 만들어 천원지방 사상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4) 어떻게 별을 관측하나? - 지상에서 남쪽 창으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 12단까지 돌과 자갈로 채워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안에서 19, 20단에 걸쳐진 정자석(井字石)에 다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25, 26단의 정자석까지 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 27단에 반원 모양의 널다란 돌이 놓여있고 그 위에 앉아 별을 관측했다.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구실을 하였던 기구인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별을 관측해 24절기를 측정하였으며 별을 관측하던 기구를‘망통’이라 하며 관측하는 사람을‘일관’이라 불렀다.

5) 첨성대가 의미하는 것 - 첨성대는 선덕여왕 재위시설 만들어져 1300여년간 신라의 하늘을 바쳐왔는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으며 처음 만들 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천문대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 둥근 원통형의 원주부는 모두 27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출입구로 알려진 남쪽창이 중앙 3단에 걸쳐 있으며 나머지 24단이 1년의 24절기를, 아래 위 12단이 1년 12달을, 세는 사람에 따라 돌의 개수가 362개 음력의 날수와 일치하는 등 천문관측과 관련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정자부의 각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 네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며 남쪽 창은 임금이 살던 월성 쪽이다.

5) 1300여년간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 경주는 지진대가 지나는 불안정한 지형으로 예로부터 지진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많다. 그 중 한 기록은 지진으로 인해 2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기록이 전해질만큼 큰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데 첨성대는 어떻게 그 지진을 견딜 수 있었나? 한마디로 잘 만들었기 때문이다. 첨성대 아래로 1.5m 정도 땅을 잘 다진 후 2단의 기단을 설치하고 돌들을 원통형으로 쌓았는데 이 돌을 쌓을 때 직각으로 쌓지 않고 안쪽으로 기울게 들여쌓기를 한 후 안을 채워 무너질 수 없는 구조로 만들었다. 그리고 19, 20단과 25, 26단에 정자석을 질러 돌들을 붙잡는 역할을 해 돌을 붙이는 접착제나 이음쇠가 없이도 강한 지진에 잘 견딜 수 있었다.

Read More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
종목 사적 제18호
시대 통일신라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삼국이 원수처럼 여기며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통일전쟁이 드디어 끝이 났다.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도 힘들었지만, 당과의 전쟁은 더욱 힘든 싸움이었다. 나당 전쟁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뭉치게 하고 그 힘으로 압록강과 원산만 이북으로 당을 몰아냈다.문무왕은 통일신라를 더욱 견고히 하고자 도성(都城) 밖을 지키는 나성(羅城)  을 세우고자 했다. 이때 왕사(王師) 지의법사의 다음과 같은 간언으로 기존의 산성을 개, 증축하여 수도 방어벽을 굳건히 하는데 힘을 쏟았다. "임금님께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

삼국이 원수처럼 여기며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통일전쟁이 드디어 끝이 났다.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도 힘들었지만, 당과의 전쟁은 더욱 힘든 싸움이었다. 나당 전쟁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뭉치게 하고 그 힘으로 압록강과 원산만 이북으로 당을 몰아냈다.

문무왕은 통일신라를 더욱 견고히 하고자 도성(都城) 밖을 지키는 나성(羅城)  을 세우고자 했다. 이때 왕사(王師) 지의법사의 다음과 같은 간언으로 기존의 산성을 개, 증축하여 수도 방어벽을 굳건히 하는데 힘을 쏟았다. "임금님께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땅에 금을 그어 놓아도 도적이 넘지를 못하고, 덕이 없으면 아무리 높은 성을 쌓아도 도적이 담을 넘을 것입니다. 이제 전쟁의 위험은 없어졌으니 나성의 건축은 마땅하지 않사옵니다."

한편 백제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문화와 고구려의 강하고 기상이 넘치는 문화에 감동된 왕은 월성(현, 반월성) 동쪽에 둘레 1,200m의 연못과 '임해전(臨海殿)'외 여러 전각을 짓고, 동궁(東宮)과 연회장으로 사용하게 했다. 세 개의 섬과 동쪽, 북쪽에 12봉우리를 만들어, 바다에 신선이 사는 형상인 삼신산(三神山)과 무산12봉(巫山十二峯)을 만들었다. 직선과 곡선이 겹쳐 굽이치는 호안은 작은 섬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한 곳에 서서 못의 크기를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백제, 고구려 문화와 신라의 감각이 하나로 어우러진 통일의 연못. 그 곳에서 파낸 흙으로 산을 만들고 동물들을 풀어 키우며, 나무와 화초를 심었다. 여러 개의 돌을 모아 쌓다가 한 개의 돌을 우뚝 솟게 하며, 드문드문 배치하는 등 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이다.
 
인공 연못인 월지는 물의 정화를 위해 물이 들어가는 입수구에 2단에 걸쳐 자연 정화장치를 설치했다. 깨끗한 물을 담기 위해 못 바닥에는 바다 자갈을 경사지게 깔아 입수구와 배수구 물의 흐름을 원만하게 했다.
 

수로를 따라 들어 온 물은 두 개의 수조에 차례대로 고였다가 넘쳐흘러 넓은 웅덩이에 다시 모인다. 웅덩이에 모인 물은 좁은 물길을 따라 흘러가다 두 단의 폭포로 떨어져 바다같은 못으로 힘차게 밀고 들어간다. 폭포 바로 앞 큰 섬이 물을 두 갈래로 갈라놓는다.

좌우로 갈라진 물은 구석지고, 깊숙한 곳까지 흘러 들어가 고여 있던 물을 밀어내고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밀려난 물이렁은 수면 곳곳에  '井'자형 나무틀 안에 심어진 부평초를 흔들어 대고, 구름 걸린 전각마저 흔들고 지나간다. 자연을 축소하여 별궁 정원에 들여 왕실과 나라의 안녕를 기원하는 신선의 바다를 담고, 민족문화의 융성기를 대표하던 월지는 경순왕의 눈물을 받아내며 쇠락의 길을 걷는다.
 

삼국사기 30대 신라 문무왕 14년(647) 2월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했으나 연못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신라 41대 헌덕왕조에 '태자를 월지궁에 거처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안압지(雁鴨池)'란 이름은 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하는데, 나라가 망하고 궁이 폐허가 되고 연못에는 오로지 오리와 기러기만 유유히 노닐고 있는 것을 조선시대 선비들이 보고 '안압지(雁鴨池)'라고 불렀다.

Read More

경주 분황사
분류 불교유적
시대 신라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으로 3층만이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으로 3층만이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분황사 화쟁국사비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고려 숙종 6년(1101)에 만든 것으로,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 :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분황사 석정 
호국룡 설화가 전해지는 우물
분황사 사찰내에 마련되어 있는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 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시설해 놓은 모습으로,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물   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니,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설치된 우물로, 조선시대에 와서 불교억   압정책에 따라 사찰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   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며, 현재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Read More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종목 국보 제25호
시대 통일신라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교과서여행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위로 연꽃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머릿돌 좌우에는 6마리의 용이 3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 놓아 비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놓았다.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강한 인상을 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능숙하게 빚어낸 기법에서 당시 석조 조각의 발달상을 엿볼 수 있다.

 

Read More

경주 천마총
종목 제155호 고분
시대 신라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천마총은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천마도 장니 국보 207호)가 출토되어 붙은 이름으로 무덤 안에 들어가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와 죽은 사람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있는 지금의 풍습과 다른 점이다.천마총 발굴 이야기를 하자면, 1970년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큰 고분을 발굴한 경험이 없었다. 이전까지의 발굴은 일본인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기에 고분발굴의 축적된 경험, 기술, 사람 등이 없었기에 황남대총을 발굴할 자신감이 없었..

천마총은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천마도 장니 국보 207호)가 출토되어 붙은 이름으로 무덤 안에 들어가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와 죽은 사람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있는 지금의 풍습과 다른 점이다.

천마총 발굴 이야기를 하자면, 1970년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큰 고분을 발굴한 경험이 없었다. 이전까지의 발굴은 일본인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기에 고분발굴의 축적된 경험, 기술, 사람 등이 없었기에 황남대총을 발굴할 자신감이 없었다. 이때 발굴 경험과 기술을 익히기 위해 황남대총 옆에 있는 이름 없는 작은 고분을 시험 발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발굴결과는 예상밖에 대단한 것이었다. 정작 무덤의 주인이 2명인 황남대총보다, 더욱 화려한 황금유물 등 1만2천여점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옛 속담을 생각하게 되는 사건이다.

금관(국보 188호), 금모(국보 189호), 금제 과대 및 요패(국보 190호), 금제 접형관식(보물 617호), 금제 조익형관식(보물 618호), 경식(보물 619호), 유리배(보물 620호), 금동장 봉황 환두대도(보물 621호), 금동제 초두(보물 622호)등이 출토됐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천마도(국보 제207호)

 

Read More

경주 대릉원
종목 사적 제512호
시대 신라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경주 시내를 멀리서 바라볼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낮은 건물 사이로 작은 산과 같은 고분들이 우뚝우뚝 솟아있는 모습이다. 산 사람들의 땅위 집들 보다, 죽은 사람들의 땅 밑 집들인 무덤이 더욱 많은 도시가 옛 도시 경주이다.경주에 있는 고분 중 평지에 만들어진 것들은 월성과 계림을 기준으로 하면 모두 북서쪽에 자리한 황남, 황오, 노서, 노동동에 모여있다. 이들 시내 큰 고분의 특징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과 금관의 출토이다. 경주시내에 있는 큰 고분들은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이 ..

경주 시내를 멀리서 바라볼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낮은 건물 사이로 작은 산과 같은 고분들이 우뚝우뚝 솟아있는 모습이다. 산 사람들의 땅위 집들 보다, 죽은 사람들의 땅 밑 집들인 무덤이 더욱 많은 도시가 옛 도시 경주이다.

경주에 있는 고분 중 평지에 만들어진 것들은 월성과 계림을 기준으로 하면 모두 북서쪽에 자리한 황남, 황오, 노서, 노동동에 모여있다. 이들 시내 큰 고분의 특징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과 금관의 출토이다. 경주시내에 있는 큰 고분들은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이 때는 신라왕들의 이름이 마립간으로 불리던 시기이다.

대릉원 지역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유물로는 용의 머리에 거북이의 몸이 합쳐진 '서수형 토기', 수레 모양을 그대로 본떠 만든 토기, 상감 목걸리 그리고 국보로 지정된 토우가 붙은 항아리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대릉원은 1970년대 경주관광종합개발 계획에 의해 당시 고분 밀집 지역의 마을을 철거하고, 지금의 무덤 공원으로 조성된 곳이다. 이름대로 큰 무덤이 있는 공원이라 해석할 수 도 있지만, 대릉원 지역을 '미추왕릉역 고분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추왕은 제13대 임금으로 김씨로는 처음 왕위에 오른 임금인데, 삼국유사 왕력편에 미추왕의 능 이름을 '대릉(大陵)'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미추왕릉이 대릉이 있는 릉원이라 풀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신라 초기 행정의 중심지인 나정과 창림사지가 있는 도당산에서 5대 파사왕 때 지금의 월성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신라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박, 석, 김씨가 번갈아 왕위를 차지하다가 18대 실성왕 때부터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는 체제를 갖추게 된다. 이는 곧 고대국가로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대국가의 발전은 주변 군소 국가들의 정복사업을 밑바탕으로 하고, 이는 곧 왕권 강화와 직결된다.

정복사업으로 얻게된 경제적, 인적 자원과 한층 강화된 왕권으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대형고분들을 조성하게되는 것이다. 황오동 고분군에서부터 지금 대릉원이 있는 황남동 고분군 쪽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대릉원 안의 원형토분들의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지표 위에 잔돌을 깔고 긴 판자로 귀틀집 모양의 목곽을 짜고, 금관, 구슬목거리, 금 허리띠, 칼, 금동 신발을 신은 채 동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워있으며, 머리맡에는 부장품을 넣는 목곽을 설치하였다. 목곽 뚜껑을 덮고, 목곽 위에는 사람 머리 만한 돌을 수북히 쌓고 다시 찰흙을 얇게 덮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완성하는 방식이다.
 

돌로 무덤 외부를 쌓는 적석(積石) 무덤은 고구려나 백제에도 존재하지만, 적석 위에 다시 흙을 덮는 형태의 무덤은 신라에서만 사용한 묘제였다. 이런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4세기부터 나타나는 무덤양식으로 이전의 신라에서는 몰 수 없는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묘제란 가장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문화로 외부의 영향이나 내부의 큰 변화가 없이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지금도 의식주는 외국식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장례식만큼은 전통식으로 하고 있는데서 묘제의 보수성을 짐작할 수 있다.  4세기 돌무지덧널무덤의 출현을 보는 시각은,

첫째 북방 기마민족의 영향인데, 유입 경로로는 기원전 흑해 위에 있었던 스키타이의 묘제와 몽골에 남아 있는 돌무지덧널 형태의 무덤을 근거로 하고 있다.

둘째는, 내부적인 발전인데 황오동의 고분들보다 황남동의 고분들의 규모가 훨씬 크고, 무덤 내부에서도, 오동의 고분들에서는 목곽이 발견되지 않은 무덤이 많다. 그리고 3세기경 고분군으로 추정되는 흥해 고분군의 발굴에서 돌무지덧널무덤의 전단계로 보이는 묘제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 인쇄하기

Read More

경주 석굴암
종목 국보 제24호
시대 통일신라
자료출처 문화재청
사진출처 교과서여행(신라역사과학관 사진촬영)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대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삼층석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대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삼층석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한편,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