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우수영관광지
위치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산36
연락처 061-530-5541
자료.사진출처 해남문화관광
우수영 관광지 -불멸의 이순신과 명량대첩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위치해 있는 우수영관광지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곳으로 당시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을 성지화하기 위해 세운 기념공원으로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1597년  충무공이 이룩한 명랑대첩을 기념하고 옛 성지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복원하려는 뜻에서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했고 1991년 명량대첩 기념공원으로 조성해  명량대첩의 역사적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으..
우수영 관광지 -불멸의 이순신과 명량대첩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위치해 있는 우수영관광지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곳으로 당시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을 성지화하기 위해 세운 기념공원으로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1597년  충무공이 이룩한 명랑대첩을 기념하고 옛 성지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복원하려는 뜻에서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했고 1991년 명량대첩 기념공원으로 조성해  명량대첩의 역사적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울돌목이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거북배등 다양한 체험공간을 활용해 10월에는 전남도 축제로 명량대첩축제와 주말에는 명량역사체험마당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공원 내  또 공원 곳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관군들의 전투모습을 조각한상들이 배치되어 생생한 감동을  공원내 전망대에 서면 명량해협과 진도대교를 비롯하여 명량대첩탑, 명량대첩비 탁본, 어록비, 충무공유물전시관 등의 시설물들이 보인다.
총무공 유물전시관에는 명랑해전에서 사용했던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이 전시되어있고 그대의 활약상을 담은 영상도 상영한다. 또 거북선 실제모형, 거북선 절개모형, 판옥선 모형, 여러 가지 무기, 및, 명량해전에서 사용했던 천자총통, 지자총통이 전시돼 있고  공원내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관군의 전투 모습을 조각한 상들이 배치되어 생생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리고 강강술래 세계무형문화재 배경과 객사. 토성. 전적지 등 과 주변에는 충무사. 울독목. 진도대교 등의 관광지가 있다.

* 명량대첩탑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명량대첩기념공원내에 있는 명량대첩 탑은 지난 1990년 기념공원 조성과 함께 세워진 탑이다. 이 기념탑은 1597년 9월16일충무공 이순신장군이 휘하의 장병들과 지역 의병들이 울돌목의 지형과 조류를 이용하여 13척의 병선으로 왜선 133여척을 격파한 세계 해전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 승첩(勝捷)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으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탑의 조형은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영령들을 기리는 높이17m, 넓이19.12m의 화강암으로 된 명량대첩 탑이 우뚝 솟아 충무공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싸우는 관병과 의병들의 모습을 군상 조각으로 배치했다.

*명량대첩의의비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곳으로 당시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을 성지화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공원의 건립 의의를 기록한 비이다.

*충무공어록비
"병법에 이르기를 전쟁에 임하여 반드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길만을 찾고자 하면 죽는다"의 (필사즉생,필생즉사)와 한명의 군사로도 길목을 지킨다면 천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일부당경,족구천부)의 어록 글이다.

*회령포결의상
명량을 최후의 결전장으로 삼고 장흥 회령포에 당도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 5장군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폐선수리상
칠천량 패전이후 우리에게 남은 전선은 부서진 판옥선 12척 뿐이었습니다. 이 때 밤낮으로 폐선을 수리하여 명량해전을 가능케 해준 정충량,김세호 등 무명의 선장과 목수들의 공을 기린 상입니다. 그래서 우수영에 페선1척이 수리해 보태어져13척이 됐다고 한다.

*마씨오부자상
부친 마하수(馬河秀)부친이 적선에 포위된 통제사를 구원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복수를 맹세하고 적이 패퇴할 대까지 결사의 항쟁을 한 부자의 공을 기린 상이다.

*울돌목 쇠사슬
울돌목 해안 양쪽에 쇠사슬을 매어놓고 일본전선을 유인하여 쇠사슬을 잡아당기면 일본전선이 쇠사슬에 걸려 뒤집히게 했다는 설화에 따라 복원하여 만든 것이다.  

*오극신 부자 참전상
해남출신 오극신 계적 부자가 의병으로 참전하여 싸우다가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한 것을 기리기 위한 상이다.

*양씨숙질 조씨부자 참전상
조응량 부자와 양응지 숙질이 의병으로 참전하여 명량해전에서 적을 무찌르다 승리를 눈앞에 두고 전사하여 공을 기린 상이다.  

*충무공어록비
충무공어록비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충무공의 서한문 일절을 의재 허백련 선생이 쓰신 글로서 그 뜻은 “만약호남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나라와 겨레를 보존 하였으리오” 라는 내용입니다. (1593년에 난중일기기록의, 사헌부지평 현덕승의 서한문 )명량대첩의 승리는 해상 의병의  눈부신 활약, 울돌목의 거센 물살, 이순신의 지혜가 삼위일체가 돼 이룬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남사람들을 비롯한 호남사람들의 애국정신을 느낄 수 있는 비이다.

*울돌목
울돌목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이 13척의 병선으로 조류를 이용해 왜선 133척을 격퇴시킴으로써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이룩한 곳으로 조선을 구한 명량대첩 전첩지이다.
눈 앞에서 소용돌이치는 울돌목이 인상적이다.

바다가 운다고 해 명량이라 이름되기도 하는 울돌목은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사이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으로 넓이가 325m,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20m, 유속이 11.5노트에 달해 굴곡이 심한 암초사이를 소용돌이 치는 급류가 흐른다.
이러한 빠른 물길이 암초에 부딪쳐 튕겨져 나오는 바다소리가 20리 밖까지도 들린다고 한다. 이러한 지형의 특징이 정유재란 당시 3백여척의 왜선들에게 손쓸 방도도 없이 참패를 안겨준 큰 요인이 됐던 것이다. 울음을 터트리는 울돌목 바다위로 지금은 아취형 진도대교가 허공을 가른다.

*울돌목의 유속(물살)
울돌목의 유속은 왜 빠를까요??
국립해양조사원 분석 자료에 의하면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때 해안의 양쪽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이 빠른 급류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특이한 지형조건의 울돌목은 병법적으로 보면 사지(死地)라고 한다. 이순신장군은 이런 울돌목의 사지를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은 너무 불리하다고 판단해 1597년 9월16일 명량대첩이 있기 하루 전인 15일에 진을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으로 옮긴다. 이러한 지형을 이용해 사지를 적의 등 뒤에 위치할 수 있도록 해서  솔선수범 하는 자세로 조선수군과 이순신장군은 조선수군의 제해권을 확보하는신화를 창조 한다.
울돌목의 소용돌이 치는 급류를 보려면 바닷물이 들고 나는시간(물때)을 알아야 한다. 물때가 매일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오후 2시 ~ 4시 사이에 소용돌이 치는 울돌목의 급류를 볼 수 있다.

*전라우수영은?
해남에서 부안까지의 서해안을 경비했던 전라우수영은 진도를 바라볼 수 있는 명량 해협과 해남의 남단 화원 반도에 접해 있고, 울돌목이 앞으로 펼쳐져 있다.
우수영은 명량대첩전첩지로 우리나라 해전사에 빼놓을 수 없는 대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자 강강술래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이곳이 우수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위치 때문이었다. 원래 이곳은 백제 때는 황술현의 한 지역이었으며 고려 때에는 영암에 속한 황원군의 땅이었다가 1448년(세종30) 해남현이 된 곳이다.

전라우수영은 조선시대(수군)해군 사령본부인 하나로 부산의 경상좌수영, 충무의 경상우수영, 여수의 전라좌수영, 해남의 전라우수영이 있다. 그밖에 충청도나 강화에도 수영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왜구와 접촉이 극심한 전라도와 경상도에 한하여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는 주진을 각각 두 곳에 설치하였는데, 서울에서 보아 각도의 서편, 즉 우편을 전담하는 주진을 우수영, 동편 즉 좌편을 전담하는 주진을 좌수영이라 하였다.  
전라수영이 설치된 것은 1440년(세종22)의 일이었고, 1432년(세종14) 무안 대굴포에 있던 처치사영(處置使營)이 현재의 목포로 옮겨지고 목포에 있던 병선들이 지금의 우수영인 황원의 주량(周梁)으로 옮겨지면서 이곳에 목포만호를 두게 된다.
황원 주량의 전라수영이 우수영(전라우도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된 것은 성종10년(1479)부터의 일로 전라도 서남해안이 너무 광범위하여 여수에 전라좌수영이 개설되면서 이곳은 전라우수영, 약칭 우수영이 된 것이다.
경상우수영은 처음에 거제에 두었다가 1604년(선조37) 충무로 옮겼으며 각 수영에는 한학의 역학(譯學)과 왜학의 역학을 각1인을 두었고. 1907년 군대 해산령에 의하면 각 도의 수영은 폐영되었으나, 지금까지도 수영이 남았던 곳은 그 명칭과 함께 흔적이 남아있어 우수영이라 부른다.

*강 강 술 래 (세계무형문화유산)
문내면 우수영 일대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는 해남 강강술래놀이는 해남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이자 전라남도 해안 일대와 섬 지방에 널리 분포 전승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부녀자 놀이중 하나다.
이 놀이는 8월 한가위 세시풍속 놀이지만, 정월대보름에 행해지기도 한다.
한가위와 대보름날 달 밝은 밤에 마을의 처녀들과 아낙네들이 새 옷으로 단장하고 손과 손을 맞잡고 원무하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놀이를 번갈아 가면서 밤이 지새도록 노는 모습은 전라도 특유의 풍류와 멋이 들어있다.
강강술래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적에게 아군의 숫자가 많음을 위장하기 위해 원무를 행하게 한 것에서 유래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설은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에 전해오고 있는 전설에 근거를 둔 것으로 이순신 장군이 해남의 옥매산(玉埋山), 진도의 만금산(滿金山), 목포의 유달산 노적봉(露績峯) 등을 마람으로 엮어서 군량미를 노적으로 보이게 하고 또 인근 부녀자들을 동원 남장으로 변장 병력이 많음을 위장하기 위해서 손과 손을 마주잡고 원무(圓舞)토록 한 것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강강술래 놀이는 여러 설이 있는데 고대 마한 때부터 비롯되었다는 설, 고대의 수확제의 오신행사 놀이에서 연원 되었다는 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창안했다는 설 등 여러 설이 있다.
해남강강술래는 문내면 ‘강강술래보존회’를 중심으로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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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다산초당
종목 사적 제107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유배되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이름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유형원과 함께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쌓기도 했다. 정조가 죽자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유배되었고, 그 후 18년 간의 유배생활 동안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원형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곳에서 ..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유배되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이름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유형원과 함께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쌓기도 했다. 정조가 죽자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유배되었고, 그 후 18년 간의 유배생활 동안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원형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곳에서 11년 동안 머물면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측량’,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옛 초당은 무너져서 1958년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하여 건물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초당을 다시 지은 것이다. 작고 소박한 남향집으로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 뒤 언덕 암석에는 다산이 직접 깎은 ‘정석(丁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초당 왼쪽으로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앞 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청석’이 있고, 한 켠에는 ‘약천(藥泉)’이라는 약수터가 있어 당시 다산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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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다산유물전시관
위치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
사진.자료출처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강진군
다산기념관은 강진을 배경으로 펼쳐진 다산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만남/생애/환생/흔적 등의 테마에 맞춰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들이 패널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있습니다. 또한 영상실에서는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애니메이션이 상영됩니다.  

다산기념관은 강진을 배경으로 펼쳐진 다산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만남/생애/환생/흔적 등의 테마에 맞춰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들이 패널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있습니다. 또한 영상실에서는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애니메이션이 상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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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하멜기념관
위치 전남 강진군 병영면 병영성로 180
연락처 061-430-3318
자료.사진출처 강진문화관광
하멜기념관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하멜보고서』의 저자 헨드릭 하멜(Hendric Hamel)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강진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와의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위해 개관하였다. 타원형의 목조건축으로 지어진 왼쪽의 전시관은 하멜이 표착한 남도의 섬을 상징하며, 오른쪽 각진 형태의 건물은 망망대해에 표류한 조난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상징한다. 전시실은 『하멜보고서』를 비롯하여 하멜의 생애, 17세기 조선과 네덜란드의 사회·문화·역사적 상황, 그리고 강진군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의 자..

하멜기념관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하멜보고서』의 저자 헨드릭 하멜(Hendric Hamel)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강진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와의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위해 개관하였다.

타원형의 목조건축으로 지어진 왼쪽의 전시관은 하멜이 표착한 남도의 섬을 상징하며, 오른쪽 각진 형태의 건물은 망망대해에 표류한 조난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상징한다. 전시실은 『하멜보고서』를 비롯하여 하멜의 생애, 17세기 조선과 네덜란드의 사회·문화·역사적 상황, 그리고 강진군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의 자매결연 등 각 주제별로 감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있다. 하멜기념관은 1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 중 70여 점의 유물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하멜기념관은 하멜의 조선 표착의 역사적 의미 및 17세기 국제 교류사의 조사연구, 유물 전시를 통한 교육, 나아가 한국·네덜란드 간의 문화적 교류 증대를 위해 지역 전문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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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송광사
종목 사적 제506호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우리나라 삼보사찰(불보, 법보, 승보) 중 하나인 승보사찰로서 유명한 송광사는 신라말 ‘체징’이 길상사라는 소규모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어,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대찰로 중건된 후 고려부터 조선 초까지 16명의 국사가 배출된 곳이다. 경내에는 16국사의 진영을 봉안한 국보 제56호 ‘송광사국사전’ 등 3점, 보물 12점 등 다수의 중요문화재와 국사의 부도를 모신 암자가 위치하여 역사적·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크다...

우리나라 삼보사찰(불보, 법보, 승보) 중 하나인 승보사찰로서 유명한 송광사는 신라말 ‘체징’이 길상사라는 소규모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어,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대찰로 중건된 후 고려부터 조선 초까지 16명의 국사가 배출된 곳이다.

경내에는 16국사의 진영을 봉안한 국보 제56호 ‘송광사국사전’ 등 3점, 보물 12점 등 다수의 중요문화재와 국사의 부도를 모신 암자가 위치하여 역사적·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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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낙안읍성
종목 사적 제302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낙안 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 중 하나이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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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순천만
종목 명승 제41호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순천만은 남해안 지역에 발달한 연안습지 중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하며, 갯벌에 펼쳐지는 갈대밭과 칠면초 군락, S자형 수로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해안생태경관을 보여주는 경승지이다. 넓은 갯벌에는 갯지렁이류와 각종 게류, 조개류 등 갯벌 생물상이 다양하고 풍부하여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와 먹황새, 노랑부리저어새를 비롯한 흰목물떼새, 방울새, 개개비, 검은머리물떼새 등 11종의 국제 희귀조류와 200여종의 조류가 이곳을 찾는 등 생물학적 가치가 크다. 특히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일몰과 철새가 떼 지어 날아오르는 광경..

순천만은 남해안 지역에 발달한 연안습지 중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하며, 갯벌에 펼쳐지는 갈대밭과 칠면초 군락, S자형 수로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해안생태경관을 보여주는 경승지이다.

넓은 갯벌에는 갯지렁이류와 각종 게류, 조개류 등 갯벌 생물상이 다양하고 풍부하여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와 먹황새, 노랑부리저어새를 비롯한 흰목물떼새, 방울새, 개개비, 검은머리물떼새 등 11종의 국제 희귀조류와 200여종의 조류가 이곳을 찾는 등 생물학적 가치가 크다.

특히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일몰과 철새가 떼 지어 날아오르는 광경이 장관을 이루어 2006년에는 한국관광공사 최우수 경관 감상형지로 선정되는 등 경관적 가치가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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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순천만생태공원
위치 순천시 순천만길 513-25
연락처 061-749-4007
자료.사진출처 순천만생태공원
홈페이지 http://www.suncheonba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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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향일암
위치 전남 여수시 돌산읍 향일암로 60
연락처 061- 644 -4742
자료.사진출처 여수시 관광정보
우리나라 4대 관음기도처(낙산사 홍련암, 남해 금산의 보리암 , 강화도 보문암, 여수 금오산 향일암)중 한 곳인 향일암(向日庵)은 돌산도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서기 644년 백제 의장왕 13년 원효대사가 원통암(圓通庵)이란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광종 9년(958년) 윤필대사가 금오암(金鼇庵)으로 개칭하여 불리어 오다가,남해의 수평선에서 솟아오르는 해돋이 광경이 아름다워 조선 숙종41년(1715년) 인묵대사가 향일암이라 명명(命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일암은 해안가 수직 절벽위에 건립되었으며, ..

우리나라 4대 관음기도처(낙산사 홍련암, 남해 금산의 보리암 , 강화도 보문암, 여수 금오산 향일암)중 한 곳인 향일암(向日庵)은 돌산도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서기 644년 백제 의장왕 13년 원효대사가 원통암(圓通庵)이란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광종 9년(958년) 윤필대사가 금오암(金鼇庵)으로 개칭하여 불리어 오다가,남해의 수평선에서 솟아오르는 해돋이 광경이 아름다워 조선 숙종41년(1715년) 인묵대사가 향일암이라 명명(命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일암은 해안가 수직 절벽위에 건립되었으며, 기암절벽 사이의 울창한 동백나무 등 아열대 식물들과 잘 조화되어 이 지역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2009년 12월 화재가 발생해서 대웅전을 비롯한 종무소, 종각이 소실됐으나 재건하였다.

향일암의 특징이라면 커다란 돌들이 입구가 되기도 하고, 기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평평한 곳을 골라 전각을 만들고 이런 곳들은 고스란히 남겨두어 아름다움을 더한다.

암자 곳곳에 이런 석문이 있어서 키가 큰 사람들은 고개를 낮추고 몸집이 큰 사람들은 몸을 웅크려 지나가야하기 때문에 의도하지는 않아도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겸손해지는 곳이다.

뒤로는 금오산, 앞으로는 돌산의 푸른 바다와 하늘과 만날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여행의 덤이다. 남도에서 향일암처럼 해맞이로 유명한 곳도 드물다.

일출은 물론 일몰도 볼 수 있는 특별한 곳. 기암절벽 위에서 숨을 죽이면 바다의 표면 너머로 해가 진다.

다시 아침이 오면 바다를 뚫고 해가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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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진남관
위치 전남 여수시 동문로 11
연락처 061- 659 -5711
자료.사진출처 여수시 관광정보
진남관 터는 조선시대 사백여 년 간 조선 수군의 본거지로 이용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진남관은 여수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로, 여수시 군자동 472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이곳은 원래 충무공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삼았던 진해루가 있던 자리로,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해인 1599년, 충무공 이순신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75칸의 대규모 객사를 세우고,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鎭南館'..

진남관 터는 조선시대 사백여 년 간 조선 수군의 본거지로 이용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진남관은 여수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로, 여수시 군자동 472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이곳은 원래 충무공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삼았던 진해루가 있던 자리로,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해인 1599년, 충무공 이순신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75칸의 대규모 객사를 세우고,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鎭南館' 이라고 이름 지었다.

 

객사는 성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관아와 나란히 세워지는 중심 건물로, 중앙 정청 내부 북쪽 벽 앞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함을 두고, 관아의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날마다, 나라에 국상과 같은 큰 일이 있을 때 이 전패에 절하는 '향궐 망배'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지방 관리들이 임금을 가까이 모시듯 선정을 베풀 것을 다짐하던 곳이다. 또한 진남관은 외국의 사신과 중앙으로부터 왕의 명을 받들고 내려온 대신을 접대하는 건물로 사용하기도 했다.

 

■ 전라좌수영성

진남관이 위치한 전라좌수영성은 당시에 둘레가 1.13㎞나 되는 성으로서 남쪽, 동쪽, 서쪽에 성문이 있었으며, 78개 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문 밖은 바로 바다와 성체의 형상은 원형에 가깝다.

현재 성곽터는 1.74km로 약간의 차이만 있는데, 이는 이후 설치되는 치나 옹성의 치수 산정 또는 측량방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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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이순신 광장
위치 전남 여수시 하멜로 96
연락처 061- 659 -1326
자료.사진출처 여수시 관광정보
여수시 종화동 인근 구항이 공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지난 2001년부터 5년여간의 방파제, 방파호안, 매립지등의 공사를 마친 끝에 여수시민의 시민 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평범한 공원이라기보다는 해안을 따라 1.5km 정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있고, 공연장과 놀이터, 농구장등을 갖추고 있는 온 가족을 위한 공원으로 여수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아름다운 여수 앞바다를 편안하게 볼 수 있는 휴식의 공간임은 물론, 각종 해양 관련 행사와 공연이 끊임없이 열리고 있어 볼거리가 많은 공원이기도 하..

여수시 종화동 인근 구항이 공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지난 2001년부터 5년여간의 방파제, 방파호안, 매립지등의 공사를 마친 끝에 여수시민의 시민 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평범한 공원이라기보다는 해안을 따라 1.5km 정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있고, 공연장과 놀이터, 농구장등을 갖추고 있는 온 가족을 위한 공원으로 여수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아름다운 여수 앞바다를 편안하게 볼 수 있는 휴식의 공간임은 물론, 각종 해양 관련 행사와 공연이 끊임없이 열리고 있어 볼거리가 많은 공원이기도 하다.
특히 돌산대교와 장군도등을 조망권내에 두고 있어, 공원 산책길을 따라 걷다가 야자수 아래 벤치나 돌의자에 앉아 넘실대는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의 조화로운 풍경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바다 수위가 높은 시간 때는 공원 앞까지 바다물이 차기 때문에 바다와 공원의 조화도 아주 잘 이루어져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또한 이곳은 도심에 위치하고 있어 낚시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워낙 많은 낚시꾼이 몰리는 바람에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야 낚시하기에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여름밤 야간에는 은빛 갈치를 낚을 수도 있고, 썰물때는 막바지 산란을 위해 방파제 가까이 떠오르는 낙지를 뜰채만으로 잡아 보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2010년 4월 진남관 앞쪽에 개장한 이순신광장과 구)종포해양공원이 합쳐져 지금의 이순신광장이 되었다.
지금 당신이 낚시대를 준비해서 이곳을 찾는다면 싱싱한 물고기는 물론 여수의 아름다운 야경도 낚을 수 있다.
돌산 1,2대교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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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오동도
위치 전남 여수시 오동도로 222
연락처 061- 659 -1819
자료.사진출처 여수시 관광정보
멀리서 바라보면 오동잎처럼 보이고, 오동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 해서 오동도라 불리는 이곳은 동백섬으로 유명한 여수의 상징이다. 오동도에 서식하는 동백은 말 그대로 동백(冬柏)으로 11월경부터 피기 시작해 이듬해 4월까지 온 섬을 붉게 물들인다. 여수의 중심가에서 약 10분쯤의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오동도 입구 주차장에서 약 15분가량의 방파제 길을 따라 걸으면 도착한다. 특히 방파제는 여수미협 작가들이 1개월간의 공동작업으로 완성한 벽화가 인상적으로, 이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바 ..

멀리서 바라보면 오동잎처럼 보이고, 오동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 해서 오동도라 불리는 이곳은 동백섬으로 유명한 여수의 상징이다.

오동도에 서식하는 동백은 말 그대로 동백(冬柏)으로 11월경부터 피기 시작해 이듬해 4월까지 온 섬을 붉게 물들인다.

여수의 중심가에서 약 10분쯤의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오동도 입구 주차장에서 약 15분가량의 방파제 길을 따라 걸으면 도착한다.

특히 방파제는 여수미협 작가들이 1개월간의 공동작업으로 완성한 벽화가 인상적으로, 이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바 있을 만큼 운치가 있다.

오동도 안에 자리한 테마공원에는 25미터의 높이를 자랑하는 등대가 있고, 음악 분수대, 맨발산책로 등이 있다.

1952년 5월 처음으로 불빛을 밝힌 오동도 등대는 여수항과 광양항을 드나드는 선박의 길잡이 역할은 물론 해마다 200여 만명의 관광객이 찾아 지역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2층에 마련된 등대 홍보관에서는 등대와 바다에 관한 자료들을 전시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2.5km에 이르는 자연 숲 터널식 산책로는 수령 100년이 넘은 동백나무들에 수없이 많은 꽃이 피었다가 나무 아래 떨어져 동백꽃길을 만든다.

오동도는 동백 피는 철이 최고라지만 어느 계절에도 숲은 충분히 아름답다.

큰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늘과 가지들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알맞게 뒤섞여 숲은 정갈하고 온화하다.

미로 같은 산책길 옆으로 펼쳐진 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으로 바위와 병풍바위와 소라바위, 지붕바위, 코끼리 바위 등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겨울부터 봄까지 3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발그레한 볼을 붉히는 오동도. 2011년 여수시는 오동도 산책로에 깔려 있던 기존 콘크리트 구조물을 모두 걷어내고, 인공 황톳길로 이루어진 웰빙 트레킹 코스를 조성해 찾는 이들에게 한층 더 기쁨을 주고 있다.

오동나무

멀리서 보면 지형의 생김새가 오동잎처럼 보이고 옛날에는 오동나무가 빽빽이 있어 오동도라 불리었지만 현재는 오동나무를 보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고려 공민왕때 요승 신돈이 봉황이 오동나무 열매를 먹기 위해 오동도에 드나들고 이것은 왕조에 불길한 징조라 주장하여, 오동도의 오동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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