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불국사
종목 사적 제502호
시대 통일신라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울산으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 시내를 벗어나면 꽤 높은 산이 동편에 나타난다. 신라인들이 동악이라 부르며 신성시하던 토함산이다. 이 산에는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건립된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석굴암에서 동쪽 산비탈을 곧장 내려가면 장항리를 지나, 위대한 통일군주 문무대왕이 잠든 대왕암이 있는 동해로 이어진다. 일연 스님이 지은「삼국유사」에는 재상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만들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과연 재상의 신분으로 불국사와 석..

울산으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 시내를 벗어나면 꽤 높은 산이 동편에 나타난다. 신라인들이 동악이라 부르며 신성시하던 토함산이다. 이 산에는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건립된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

석굴암에서 동쪽 산비탈을 곧장 내려가면 장항리를 지나, 위대한 통일군주 문무대왕이 잠든 대왕암이 있는 동해로 이어진다. 일연 스님이 지은「삼국유사」에는 재상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만들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연 재상의 신분으로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큰 토목공사를 할 수 있는 재력이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경덕왕 때인 751년 공사를 시작해,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했다 한다. 총 공사기간은 24년이다.

 

부처님 나라를 만든 신라인의 자신감 - 불국사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자신감은 사람들이 사는 땅위에 부처님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로 표현된다. 신라사람들은 옛날부터 신성시 한 토함산에 부처님 나라를 만들었다. 불국사(佛國寺) 이름을 그대로 해석하면 부처님 나라가 된다.

불국사는 토함산 서쪽 경사진 곳에 축대를 쌓고 절을 세운 산지가람의 성격을 띠고 있다. 불국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천왕문을 통해 들어오면 정면에 보이는 백운교, 청운교, 자하문, 범영루, 좌경루가 있고 안쪽에는 석가탑, 다보탑, 무설전으로 구성된 대웅전영역과 이보다 조금 낮은 축대 위에 세워진 연화교, 칠보교, 안양문 등으로 구성된 극락전영역이다.

불국사를 정면에서 살펴보면 석가정토의 대웅전이 아미여래의 극락전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석가여래 상주 설법탑.
 

신라 삼층석탑의 기준 - 석가탑 (국보 21호)

석가탑(석가여래 상주 설법탑)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높이는 8.2m, 아무런 조각이 없는 2층 기단 위에 3층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양식이다. 석가탑은 통일신라 초기에 만들어진 감은사 탑과 고선사 탑이 지닌 무거운 석탑양식에서 벗어나 날씬한 비례를 적용함으로써 더욱 추상적이고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후 신라석탑의 기준이 된다. 1966년 석가탑을 해체하였을 때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왔다.

 


▲다보여래 상주 증명탑.
 

신라석공의 솜씨 자랑 - 다보탑 (국보 20호)

다보탑(다보여래 상주 증명탑)은 석가여래의 설법을 찬양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다보탑은 높이 10.4m로 석가탑 보다 조금 높다. 4개 계단이 있는 정사각형의 기단 위에 1층은 속이 보이게 네 기둥을 세웠고, 지붕은 사각으로 기와집의 처마를 달았다. 2층은 사각난간이 있고 지붕은 팔각이다.

3층은 팔각난간과 연꽃이 활짝 핀 원으로 된 지붕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도형을 통해 많은 변화를 주었다. 다보탑의 복잡하고 화려한 장식 및 독특한 구조와 표현법은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것으로 단단한 화강암을 이용해 목조건축처럼 만든 신라석공의 솜씨가 놀랍다.

대웅전영역을 하늘에서 보면 탑과 축대의 배치 또한 절묘하다. 단순 소박한 석가탑은 복잡 화려한 범영루 뒤에, 복잡 화려한 다보탑은 단순 소박한 좌경루 뒤에 두어 3차원적인 균형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지닌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범영루와 좌경루의 모습이 다르게 된다. 불국사 축대에는 건축의 기본원리인 좌우대칭의 미를 따르지 않는 독창적인 멋이 숨어 있다. 다보탑에는 돌사자가 한 마리 있는데 원래는 네 마리가 귀퉁이마다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 세 개는 사라지고 얼굴이 깨어진 한 마리만 남아 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 - 극락전 금동아미타불 (국보 27호)

연꽃다리와 일곱 보석다리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극락세계다. 이곳에는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금동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원만한 얼굴에 오른쪽 어깨는 가사를 벗었고 오른손은 가볍게 다리 위에 얹었다.

곧은 몸과 단정하고 인자한 얼굴 모습은 전체적으로 자비롭고 존엄한 느낌을 준다.
극락전 아미타불은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가장 크고 훌륭한 불상으로 비로전의 비로자나불과 백률사의 약사여래상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3대 금동불이라 불린다.


부처님의 본체 - 비로자나불 (국보 26호)

비로전은 관음전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곳에 있다. 화엄경 사상에 따르면 비로자나불은 모든 부처님의 본체로 ‘빛을 인간세계에 널리 비쳐 준다’는 뜻이다. 수인은 지권인으로 오른손은 부처의 세계를 표시하고 왼손은 중생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런 형상으로 손가락의 모습을 취하여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깊은 뜻을 나타낸다. 비로자나불의 얼굴 모습과 옷의 처리 등 세련된 수법은 지극히 아름다운 형상을 나타내어 신라인의 탁월한 솜씨를 보여 준다.
 


극락세계에 이르는 연꽃다리와 일곱 보석다리.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푸른 구름다리, 흰 구름다리.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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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신라역사과학관
위치 경주시 하동 201번지
연락처 054-745-4998
자료.사진출처 신라역사과학관
홈페이지 http://www.sasm.or.kr/
하늘엔 천상도 땅엔 왕경도 - 제 1 전시실  8세기 경 경주 왕경의 모습을 재현하여 놓은 신라왕경도, 첨성대의 내부모습의 볼 수 있는 모형을 20분의1로 축조해서 전시하고 있다. 또 천정에는 첨성대를 건립한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재위 기간인 서기 632~647년에 해당하는 위치의 별들을 재현시켜 놓았다. 그 외 선덕여왕 영정과 4급보상식 물시계가 복원되어 있다. 세계문화유산 석굴암 - 제 2 전시실 석굴암을 5분의1 축적으로 1개, 10분의 1 축척으로 7개를 제작하여 석굴의 내부와 외부구조, 그리고 현재의 상태와 원형의 ..

하늘엔 천상도 땅엔 왕경도 - 제 1 전시실
 8세기 경 경주 왕경의 모습을 재현하여 놓은 신라왕경도, 첨성대의 내부모습의 볼 수 있는 모형을 20분의1로 축조해서 전시하고 있다. 또 천정에는 첨성대를 건립한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재위 기간인 서기 632~647년에 해당하는 위치의 별들을 재현시켜 놓았다. 그 외 선덕여왕 영정과 4급보상식 물시계가 복원되어 있다.

세계문화유산 석굴암 - 제 2 전시실

석굴암을 5분의1 축적으로 1개, 10분의 1 축척으로 7개를 제작하여 석굴의 내부와 외부구조, 그리고 현재의 상태와 원형의 추정, 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전실의 전개와, 꺾임 문제, 광창의 유무문제 등을 모두 수용하여 그것을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국의 소리 범종과 과학세계 - 제 3 전시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원사 범종을 실물크기로 복원․제작하여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최고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복원전시하고 있으며 그밖에도 조선시대 해시계인 양부일구, 천상열차분야지도 등도 전시되어 있다.

한해의 시작점에 선 석굴암, 감은사, 문무왕릉 - 제 4 전시실

첨성대 정상부분을 실물크기로 복원, 전시하고 있으며 문무대왕 수중릉과 감은사지의 1/30축소 모형을 제작하고 신라사람들이 일년의 시작으로 여긴 동짓날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일출탑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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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국립경주박물관
위치 경주시 일정로 186
연락처 054-740-7500
자료.사진출처 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 http://gyeongju.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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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포석정
종목 사적 제1호
자료.사진출처 교과서여행
기록에는 포석정일대를 성남이궁(城南離宮)터라 한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하셨을 때 머루는 별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남이궁이란 즉 궁궐 남쪽에 있는 별궁의 의미이다. 총 63개로 구성되어 있는 포석정은 돌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놓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즐기던 곡수거만 남아있을 뿐 나머지 건축터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이곳을 발굴 조사하던 중 가로 5.5cm, 세로 8cm의 네모난 선 안에 가로로 ‘砲石(포석)’이라고 새겨 진 문자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의 이름과 건물이 있었..

기록에는 포석정일대를 성남이궁(城南離宮)터라 한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하셨을 때 머루는 별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남이궁이란 즉 궁궐 남쪽에 있는 별궁의 의미이다. 총 63개로 구성되어 있는 포석정은 돌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놓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즐기던 곡수거만 남아있을 뿐 나머지 건축터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이곳을 발굴 조사하던 중 가로 5.5cm, 세로 8cm의 네모난 선 안에 가로로 ‘砲石(포석)’이라고 새겨 진 문자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의 이름과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포석정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49대 헌강왕(876~886)이 남산으로 행차하여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포석정은 9세기 중엽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곡수거에는 원래 큰 돌거북을 만들어 놓고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다가 그 거북의 입으로 물이 나와 돌홈으로 흘러가게 한 것인데, 이 돌거북은 조선조 말엽 어느 부윤(府尹)이 옮겨다가 자기 조상 무덤의 비석대로 사용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거북의 행방은 알지 못하고 있다.

다시 생각하는 신라통일말 역사
그러나 신라천년의 종말을 내린 슬픈 자취가 기록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는 신라 55대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이 침입해오는데도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이 기록 때문에 지금까지 포석정은 왕들의 놀이터로, 신라를 멸망의 길로 이끈 중요한 이유로 얘기돼 왔다. 그런데 최근 포석정이 신라왕들의 놀이터가 아니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첫째, 신라인들에게 포석정이 위치한 남산은 현재 남아있는 불교유적들로 봐서 신라인의 정신세계 신앙 그 자체로 여겨진 곳으로 이런 곳에서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포석정 자체도 남산에 포함되는 곳으로 신라인들의 정신세계와 관련된 성소(聖所)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최근 포석정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포석사(鮑石祠)’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됨에 따라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나 절이 이곳에 있었음이 확실시되고 있어 성소의 의미가 더욱 짙어지고 있다.
둘째, 삼국사기에는 927년 음력 11월 경애왕이 왕비와 신하들과 술잔을 띄우고 잔치를 벌이다 견훤에게 습격을 받아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음력11월은 양력12월로 이때는 물이 얼어서 야외에서 유상곡수를 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잘못 인식이 된 주된 이유는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삼국사기에 나쁜 점만 부각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포석정은 남산 신에게 제사 지내던 성소
결론적으로 포석정은 신라의 향락 퇴폐의 대명사가 아니라 신라의 성지로 나라가 국난을 당했을 때 왕들이 친히 나아가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해석을 해야할 것이다. 또한 적이 침략한 것도 모른 채 노는 것에 정신이 팔린 무능한 임금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알려진 경애왕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견훤의 군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와 남자들은 종으로 잡아가니 그 영화롭던 신라의 서울은 수라장으로 변했고, 찬란하던 거리는 피로 물들었으며, 신라의 국운이 다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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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오릉
종목 사적 제172호
시대 조선
자료.사진출처 문화재청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내부구조..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모습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삼국시대 신라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1호 무덤이 높이 10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이러한 대형 원형 봉토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 등장하는 것으로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 형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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